박해성의 시

손톱을 깎다

heystar 2018. 8. 21. 12:06

손톱을 깎다         - 박해성

 

 

 

잠이 안 와서 손톱을 깎는다

시간처럼 생처럼 천천히 아껴서 깎는다

(한 백년쯤 걸려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어둠이 닳도록 갈고 다듬다가 후후 불다가

검지 손톱이 부러진 나의 잠을 걱정하다가

 

그래 몸아,

알약을 먹여 억지로 재우려 들지 않으마

여태껏 내가 너를 부렸으니 이젠 네가 나를 부릴 차례,

 

양귀비꽃이나 그리자, 흰 종이를 펼쳐놓고

지웠다 다시 그리고 그렸다 다시 지운다

꽃이 양이 되고 양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다시 양이 되고

 

내가 양이 되어도 좋고 양이 꽃이 되어도 좋으니

 

보풀보풀 수면양말의 보풀 같은 양털을 그린다

양의 발톱을 그린다, 매애헤에그림 속 양떼가

달아난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백 마리

 

불면이 자오록한 들판, 양들의 울음소리 자자하다

 

 

 

                                   - 계간 『애지』2018,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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