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

투루판 가는 길

heystar 2018. 8. 18. 11:10

 

    투루판* 가는 길 - 박해성

 

 

 

그때 나는 이국의 아낙에게 구운 감자를 사먹고 있었지

붉은 목단이 수놓인 두건을 머리에 두른 그녀의

건너편 나무 그늘에서 검붉은 말이 꼬리를 휘둘러

파리를 쫓고 있었어 한쪽 눈을 가린 그는

천산산맥 남쪽 기슭 타림분지 누란왕국 출신이라 했다

 

오아시스가 만든 그 나라에는 사람의 얼굴에 익룡의 날개

표범의 발톱을 가진 영물이 살고 있다 전해지는데

안개 같은 지느러미로 허공을 나는 물고기라 하기도 하고

모래바람처럼 갈기를 휘날리는 맹수라 하는 이들도 있고

그것이 가릉빈가라거나 혹은 염라국 왕자라는 풍문도 돌았지

 

한 세기쯤 지나 그를 다시 만난 건 우연이었어, 그때 나는

무쇠심장 당나귀를 타고 사막으로 신을 사러 가는 길이었거든

망원렌즈에 비친 왼쪽 눈만 보고도 단박 그를 알아봤다니까

비록 늙고 야위었으나 비루해 보이지는 않았지

자잘한 풀들이 융단처럼 깔린 백양나무숲은 그와 잘 어울렸다

 

오늘, 한동안 잊고 살던 그를 JPG 화면 속으로 불러냈다

백양나무 그늘에서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 이,

오 맙소사, 그의 두 앞발이 끈 하나에 묶여 있는 걸 보고 말았지

발과 발 사이의 거리는 한 뼘 남짓, 그는 그렇게

앞발을 모으고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 서 있었던걸까,

 

        

* 텐산산맥 실크로드를 잇는 사막 속의 분지로 오아시스가 만든 도시이다.

 

 

 

 

                                     

 

                                                        - 계간 『애지』2018,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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