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 17

그리고 창밖엔 비

그리고 창밖엔 비 박해성 ​ 변심한 애인을 만나 이별주 한잔했지 눈 뜨니 대낮, 하릴없이 죽은 이들을 찾아 도서관에 들렀다가 보르헤스를 만났지 그는 악명 높은 불한당들과 힘겹게 드잡이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시큰둥, 책장만 넘기다가 쳐들어오는 졸음에 잠시 방심한 사이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절반쯤 눈을 뜨니 검은 가죽점퍼가 히죽 웃고 있었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피해 나는 조용히 그를 따라 나섰지 밖에는 느닷없는 먹장구름이 태양을 삼키는 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밀롱가가 돌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돌풍에 쫓기듯이 한참을 내달린 후에야 히히힝 앞발을 들고 말이 멈췄어, 어느새 어두워진 숲에서는 짐승들 울음소리가 채찍처럼 살갗을 파고드는데 멀리서 불빛이 깜빡였지 망설일 겨를도 없이 나는 그 집 문을 힘껏 두드렸어..

박해성의 시 2022.09.28

불량샴푸

불량 샴푸 박해성 잠결에 머리를 벅벅 긁는다 잠이 툭툭 끊어진다 잠의 변방이 달의 분화구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어지럽다 방부제에 중독된 꽃들이 분열증처럼 피어나는 거기, 눈 뜬 자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묵계가 있었으니 깨어나지 마라, 가려운 머리통은 삿되고 헛된 것이라 뇌리 속 똬리 틀었던 파충류에 지느러미가 돋는 징조이니 불량한 것은 불온하고 불온한 것은 불안하다 그래, 샴푸를 바꿔야겠어 머릿속에서 빠져나온 검은 실뱀들이 사방으로 숨어든다 한 마리가 잽싸게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아, 징그러워! 비명에 놀란 달이 방바닥에 쓰러진다 목이 길고 푸르다 허물만 남은 달을 안고 나는 조금을 건너 사리로 간다 해풍이 상어 떼처럼 달려든다 저들이 내 몸을 다 발라먹고 뼈만 남길 것 같아, 그래, 저 쟈스민향을 ..

박해성의 시 2022.09.26

중남미불면클럽

중남미불면클럽 박해성 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별에서 그들은 만났다 복사꽃에 파묻힌 그 카페는 지도에 없다, 하지만 누구나 발병이 나기 전에 찾을 수 있어야 이야기가 된다 썬크림을 발바닥에다 발랐어, 글쎄 우스개가 아니라니까 혼이 새는 거 같아, 내 몸이 항아리처럼 금간 게 분명해, 레온 펠리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얼마나 많이 만들고 깨부수고 만들고 깨부수려 하십니까 창밖에는 분홍분홍 꽃잎이 분분하다 -아직 조금밖에 죽지 못했나이다 세사르 바예호가 고백한다 마가리타를 한 모금 마신다, 취해야만 세상이 보인다는 그는 알코올의 힘으로 방울뱀을 만나고 도둑을 만나고 부처를 만나고 詩를 만난다는데 백지 위에 성벽을 쌓느라 감성경화증에 걸렸다는데 지금 우리는 만개한 덧없음에 환호해도 좋은가? 니콜라스 ..

박해성의 시 2022.03.11

파이

파이 박해성 읽던 신문을 가슴에 덮고 설핏 잠에 빠집니다 38.5도 신열을 딛고 움트는 떡잎,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묵찌빠, 적막이 실핏줄처럼 뿌리를 내립니다 사회면 비명을 씹는 염소인양 지상의 나날들을 산채로 씹어 먹는 잡식성 몸살은 오, 어느새 뇌수를 뚫고 잔가지가 무성합니다 무성한 뿔을 인 사슴이 겅중겅중 뛰어다닙니다 천방지축 달리다가 달리의 시계를 밟았나요,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박살 난 유리에 천둥번개가 스칩니까 소름처럼 파릇파릇 잡초가 돋아납니까 백지 위에 고삐를 풀어놓은 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황제에게 꼬리치는 것, 뱀피구두를 신은 것, 훈련된 것, 다족류, 발광하는 것들, 말할 수 없는 것, 방금 막 신을 버린 것, 들여다보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것들, 백과사전에도 없는 것, 토마스 핀천..

박해성의 시 2021.01.18

좀머 씨는 행복하다

좀머 씨는 행복하다 박해성 아내가 돌아왔다, 가출한지 삼년 만에 백일쯤 된 아이를 안고 왔다, 반가워서 울었다 아기 냄새가 말랑해서 울었다 나는 딸이 좋은데 아이는 아들이라, 그래도 상관없다 부러워 마라, 우리는 남자끼리 목욕탕에 갈거다 언놈 자식이냐, 이웃들이 수군거린다 내 아내가 낳았으니 분명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의 아이는 곧 내 자식이다, 요즘 사람들은 촌수를 제대로 따질 줄 몰라… 안타깝다 그녀와 나는 캠퍼스 커플이다 미대를 수석 졸업한 나는 수석이나 주우러 다녔고 무용을 전공한 그녀는 보험외판계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미안해’ 밥상 위에 쪽지를 두고 아내가 떠난 후 나는 이 세상 모든 안해에게 미안해했다 요사이 나는 절집 천정에 천룡 그리는 작업을 한다 제석천 운해 속에 용틀임하는 그분의 비늘 한..

박해성의 시 2020.12.29

우루무치에서 석양까지 달려

우루무치에서 석양까지 달려 박해성 파미르고원 접경에 도착했다 흉노공주와 이리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위구르족의 자치구, 총을 멘 군인들과 붉은 완장들이 앞을 가로 막는다 몽둥이가 늘어선 검색대를 벌벌 통과한다, 여권을 코앞에 대조하고 신발까지 벗기는 황당한, 무례한, 불쾌한, 다시는 오지말자, 주먹을 꽉 쥐었지만 천산산맥 자락 해발 2000m 호수 앞에서 불온한 결기는 무장해제 당한다 비단 같은 운해를 허리에 두른 설산 아래 늙은 가이드의 구전설화가 신의 치마폭처럼 수면에 일렁이는 사리무호, 해맑은 이마에 물방울이 맺힌 야생화가 함부로 눈물겨운데 당신은 내일 아침 떠난다, 떠나겠다 말한다 들은 듯 못 들은 듯 나는 마른 살구만 씹는다 낡은 파오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양고기를 굽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새도..

박해성의 시 2020.12.26

I am a girl.

I am a girl. 박해성 가방 위에 그려진 소녀가 윙크를 한다 한손으로 하늘 높이 흔들고 있는 핑크색 모자 위로는 파란 글자들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I am a girl’ 나는 핑크모자가 없어 저 하늘을 날아 본 적 없는 걸 엄마야 누나야 강남 살자 졸라 본 적도 없는 걸 뱅뱅 우물 안에서 허우적대다가 솔잎이나 갉아 먹다가 불휘 기픈 나무 그늘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던 걸 어미의 머리채를 잡고 북처럼 두드리는 아비 앞에 언젠가는 면도날을 씹어 뱉으리라 벼르던 걸, 폼 나게 풍선껌을 부풀리며 야반도주를 꿈꾸던 걸 이번 정거장에서 가방은 내렸다, 흔들리는 시내버스 안 차창에 비친 산전수전이 불쑥 묻는다 - Are you a girl? 느닷없는 질문에 쩔쩔매는 걸 – I’m fine, and you..

박해성의 시 2020.12.17

투루판 가는 길

투루판* 가는 길 - 박해성 그때 나는 이국의 아낙에게 구운 감자를 사먹고 있었지 붉은 목단이 수놓인 두건을 머리에 두른 그녀의 건너편 나무 그늘에서 검붉은 말이 꼬리를 휘둘러 파리를 쫓고 있었어 한쪽 눈을 가린 그는 천산산맥 남쪽 기슭 타림분지 누란왕국 출신이라 했다 오아시스가 만든 그 나라에는 사람의 얼굴에 익룡의 날개 표범의 발톱을 가진 영물이 살고 있다 전해지는데 안개 같은 지느러미로 허공을 나는 물고기라 하기도 하고 모래바람처럼 갈기를 휘날리는 맹수라 하는 이들도 있고 그것이 가릉빈가라거나 혹은 염라국 왕자라는 풍문도 돌았지 한 세기쯤 지나 그를 다시 만난 건 우연이었어, 그때 나는 무쇠심장 당나귀를 타고 사막으로 신을 사러 가는 길이었거든 망원렌즈에 비친 왼쪽 눈만 보고도 단박 그를 알아봤다니..

박해성의 시 2018.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