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는 행복하다
박해성
아내가 돌아왔다, 가출한지 삼년 만에
백일쯤 된 아이를 안고 왔다, 반가워서 울었다
아기 냄새가 말랑해서 울었다
나는 딸이 좋은데 아이는 아들이라, 그래도 상관없다
부러워 마라, 우리는 남자끼리 목욕탕에 갈거다
언놈 자식이냐, 이웃들이 수군거린다
내 아내가 낳았으니 분명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의 아이는 곧 내 자식이다, 요즘 사람들은
촌수를 제대로 따질 줄 몰라… 안타깝다
그녀와 나는 캠퍼스 커플이다
미대를 수석 졸업한 나는 수석이나 주우러 다녔고
무용을 전공한 그녀는 보험외판계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미안해’ 밥상 위에 쪽지를 두고 아내가 떠난 후
나는 이 세상 모든 안해에게 미안해했다
요사이 나는 절집 천정에 천룡 그리는 작업을 한다
제석천 운해 속에 용틀임하는 그분의 비늘 한 점
터럭 한 올도 기도하듯 붓질한다 심우도나 지장보살
만다라를 그릴 때도 노래처럼 웅얼웅얼 소원을 빌었으니
- 아내가 십리도 못 가 발병 나게 하소서 옴마니반메훔
봐라, 그녀가 돌아왔다! 오자마자 사흘째 잠만 잔다
잠든 아내 얼굴이 부처를 닮았다, 나는 절로 손을 모은다
아이가 칭얼댄다 기저귀를 갈아야겠다, 랄라
-출처; 박해성 시집『우주로 가는 포차』 2020,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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