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조 202

교감

교감 交感 박해성 장마 걷힌 건널목을 건너오신 노파 1, 쌈지공원 벤치에 앉아 헝겊가방 끌어안고 깨질듯 투명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왼쪽에서 온 노파 2, 왼쪽에 주저앉는다 아이구야야! 비명조차 유머로 들리는지 신호등 빨간 눈동자 명랑하게 윙크 하는데 꽃무늬 배낭 벗고 가운데 앉는 노파 3, 신호등이 붉으락푸르락 바뀌거나 말거나 1, 2, 3, 텅 빈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반년간 『시조정신』 2022, 秋/冬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11.04

아스팔트 위의 나비

아스팔트 위의 나비 박해성 녹색으로 직진 신호 바뀌는 바로 그 때 하얀 나비 사뿐, 앞 유리에 착지한다 애당초 아랑곳없다, 이 세상 신호등 따위 뒤차들의 재촉이 송곳처럼 꽂힌다 어금니 앙다물고 가속 페달을 밟는다 후두둑 굵어진 빗방울, 시야를 흐리는데 나비가 사라졌다, 허공이 삼킨 것처럼 오래 전 서너 달쯤 내 몸에 살던 아이처럼 지워도 어른거리는 너, 자꾸만 날아오른다 그들이 날아 간 곳 살아서는 모른다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른다, 엄마엄마 마마 마아… 별일도 아니라는 듯 와이퍼가 춤을 춘다 ​ - 출처; 『시조시학』 2022, 가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10.03

르 클레지오를 읽는 밤

르 클레지오*를 읽는 밤 박해성 모두가 다 있으나 아무것도 없는 밤 조용히 그대를 만나 눈으로 대화한다 합법적 불륜이라 하자, 뇌세포의 오르가즘을 바다가 사막 되고 모래가 설산되도록 너는 어디 있었을까, 나는 무엇이었을까 사상思想과 상사想思가 만나 잔을 부딪는다 상처 난 고양이처럼 웅크린 적막 앞에 텅 비어 가득 찬 것들, 가벼워 무거운 것들 따듯한 잔치국수나 밤참으로 대접할까봐 *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소설가이다. -출처; - 『정음시조』2022, 4호에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7.18

2분 동안

2분 동안 박해성 밥한 술 넣고 전자레인지 돌린다, 딱 2분간 그동안 밀린 설거지를 해야지, 미끈 시퍼런 유리 파편이 설익은 생을 파고든다 투명과 비명 사이 2억년이 스쳐가고 지느러미 붉은 달이 하수도로 흘러든다 저 달의 뒤를 밟아야지 이무기가 될지도 몰라 직설로는 풀지 못할 비릿한 화두를 잡고 얼굴 없는 무량이 현기증을 스쳐간다 그래도 지상의 식사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출처; 계간 『다층』 2022, 여름호에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7.09

매미를 줍다

매미를 줍다 박해성 길바닥에서 잉잉대는 매미 한 마리 주웠다 끊일 듯 손끝에 닿는 신음이 저릿한데 찢어진 날개에 설핏, 무지개가 아른댄다 오가다 그분께서 행여 돌보시려나 살구나무 곁가지에 살포시 놓아준다 남남서 햇살이 엮은 그늘이 그윽하다 그윽한 초록 아래 와불처럼 누운 사내 시커먼 비닐봉지를 목숨처럼 끌안고 있다 핏자국 얼룩진 맨발이 그 어느 성자를 닮은 품 넓은 뿌리 위에 부려놓은 꿈 깨실라 잎사귀 흔들던 바람 뒤꿈치 들고 간다 누군가 동병상련에 매앰 맴 목이 쉰다 -출처; 계간 『다층』 2022, 여름호에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7.05

토르소

토르소 박해성 우리가 물과 불과 돌을 숭배하던 시절 그 역시 별을 보며 운명을 점쳤을까, 십이월 오후 일곱 시 베르길리우스*와 마주 앉다 지금은 방황하는 4B연필을 다그칠 때 누가 꽃을 의심하고 정의를 팔고 사는가? 머리와 가슴만 남은 그가 불쑥 묻는다 죽어서도 눈을 뜨고 앉아있는 시인 등 뒤로 빙하가 녹아내린다, 화약내가 진동한다 신들은 다 어디 갔소? 뚝! 부러지는 연필심, *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 - 출처; 계간 『좋은시조』 2022, 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4.13

당근피아노

당근피아노 박해성 반백년 한구석에 웅크려있던 착한 짐승 멋대로 짖어본 적도 탈출한 적도 없지만 이제는 당근할래요, 핑계는 좋은 덩치죠 편두통을 조율하던 아스피린 같은 애인 작심하고 실수할게요, 당근 횡재시라니까 주제는 미니멀라이프, 변덕은 사절이예요 도미솔 건반 위에 엎드려 울던 엘리제도 스타카토 포르타토 널을 뛰던 베르테르도 당근에 진심이래요, 당근당근* 반갑습니다 고래를 기다리다 노래를 놓친 당신 오늘은 서두르세요 예술이죠, 헐값당근 후회만 남을 내일은 내일의 당근이 뜨죠 *당근 - 중고거래사이트 ‘당근마켓’ 알람소리. - 출처; 계간 『좋은시조』 2022, 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3.31

어떤 휴일

어떤 휴일 박해성 창밖에는 오락가락 눈발이 흩날린다 반쯤 번 영산홍이 종알거리는 거실에서 아들의 아들을 업고 자장가를 흥얼댄다 아이의 누이는 노병의 무릎에 앉아있다 만화영화 앞에서 곰처럼 졸던 그가 “으흐 셔” 함빡 진저리다, 앵두빛 젤리를 물고 아이들의 엄마는 부엌에서 달그락댄다 그녀의 남자는 눈치코치 다 내려놓고 드르렁 코를 고는 중, 냉잇국이 끓는다 출처; 『나래시조』 2021년 겨울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1.17

불꽃놀이

불꽃놀이 박해성 나 폐암 4기라네, 뇌까지 전이됐대 그 사내 키득거린다, 축제에 취한 강변 불꽃은 펑펑 터지고 나는 펑펑 울고 싶고 어두울수록 눈부신 꽃불의 외마디 비명 워매 환장허것네, 그는 셔터만 누른다 하늘님 멋진 밤이쥬? 개똥밭이 꽃밭이네유 꿈처럼 암세포처럼 허공에 헛꽃 피는데 저 착한 4기꾼 따라 야반도주나 해볼까? 한 천년 숨어살자고 슬쩍 옆구리 찔러볼까? 얄라셩 얄라리 얄라 마지막 불꽃이 튄다 내 한판 잘 놀다 가네, 카메라를 접는 그 불티가 춤을 접는다 화약연기 자욱하다 출처; 『나래시조』 2021년 겨울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