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 194

불꽃놀이 - 김상규

불꽃놀이 김상규 두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이리 주렴 내가 행복을 주지, 밀밭 위의 소녀야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신비를 알려주지 어깨에 앉아 있던 연갈색 종달새는 길들이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갔단다 소녀야, 채찍은 거둬 덤불숲에 던져주렴 밀짚 얹은 나귀는 주저앉은 나귀일 뿐 짐을 진 소녀야, 방황을 한 줌 주지 들판이 빨갛게 물든 자유를 보여주지 박하의 박하마저 겨울의 겨울마저 입김마다 번지는 시작의 귓속말 소녀야, 용기를 주지, 곧 타오를 불꽃처럼 -중앙시조신인상 수상작

좋은 시조 2024.02.15

조문국을 다녀오다 -권규미

조문국을 다녀오다 권규미 북쪽의 북쪽으로 흰 말을 타고 갔다 바람 강 얼음 산을 넘고 또 넘어서 찔레꽃 우거진 뜨락 왕의 잠에 닿았다 만발한 묵언뿐인 오래 된 꽃의 나라 원래 가시나무의 먼 혈족이었던 나는 뚝뚝 진 그 묵언을 치마폭에 거두었다 능원은 아득하고 때때로 반짝였으나 말과 글과 풍속이 서로 멀어진 탓에 면벽한 물방울들만 총총 세다 돌아왔다 -중앙일보 신춘시조상

좋은 시조 2024.02.15

반가사유 - 박명숙

반가사유 박명숙 ​ ​ ​ 입꼬리만큼 마음의 꼬리를 끌어올리고 ​ 사유는 반만 접어 무릎 위로 올린다 ​ 그믐을 흘러들어온 달빛이 정박중이다 ​ ​ 떠날 듯 머무를 듯 잠길 듯 떠오를 듯 ​ 뺨에 물린 손가락으로 고요를 짚는 동안 ​ 눈초리 휘어진 달빛이 그믐을 빠져나간다 ​ ​ ​ -출처; 박명숙 시집 『맹물 같고 맨밥 같은』 2022, 고요아침

좋은 시조 2023.02.10

아나키스트 - 신양란

아나키스트 신양란 우리동네 흰둥이, 털 빠진 떠돌이 들개 바람처럼 구름처럼 매인 데 없고 정 둔 데 없고, 위아래 분별 없고 진 데 마른 데 가릴 것 없고, 많고 적고 상관 없고, 추위 더위 거리낌 없고, 염치 체면은 배운 바 없고 지청구 눈총 아는 바 없고 가진 것 없고 받은 것 없어 베풀 것도 없는 팔자 오늘도 건들대면서 도로를 질러간다 -출처; 계간 『시조시학』 2022, 겨울호에서

좋은 시조 2022.12.31

복사꽃 속으로 - 이정환

복사꽃 속으로 이정환 복사꽃 건너가자 복사꽃 강물 건너자 다가선 꽃 앞에 눈웃음 지어보자 저 꽃을 더 보겠느냐 먼 후일 그날처럼 손에 꽃을 받아보자 손바닥에 꽃잎 받자 머리에 꽃을 받자 정수리에 꽃잎 받자 말 없는 꽃바람 앞에 앙가슴 풀어헤치자 바위에 붙은 꽃잎 바위의 가슴이지 바위의 눈빛이지 바위의 꿈빛이지 바위도 봄바람 앞에 들썩들썩 들레지 꽃 속으로 들어가서 복사꽃 가지가 되자 즈믄 꽃잎 물고 선 복사꽃 가지가 되자 땅 속에 꿈틀거리던 모든 기운 꽃으로 핀 - 출처; 이정환 시집 『코브라』 2020, 출판 작가

좋은 시조 2022.11.27

고비, 사막 -손영희

고비, 사막 손영희 아버지, 간밤에 말이 죽었어요 그때 고삐를 놓은 건지 놓친 건지 쏟아진 햇살이 무거워 눈을 감았을 뿐 한 발 올라가면 두 발 미끄러지는 잿빛 모래언덕도 시간을 허물지 못해 이곳은 지평선이 가둔 미로의 감옥입니다 한세월 신기루만 쫓다 허물어지는 사방이 길이며 사방이 절벽입니다 아버지, 간밤에 홀연히 제 말이 죽었어요 - 제 40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작 [출처] 《화중련》2022 상반기호에서

좋은 시조 2022.05.06

내 몸속의 향유고래 - 구애영

내 몸속의 향유고래 구애영 아무도 플라스틱을 알려준 적 없기에* 내 몸은 그 투명이 소설인 줄 알았다 뱃속에 가득한 쓰레기 별책 같은 수평선 세상의 난바다는 구름결을 제본한 듯 지워진 파문을 저어 적막을 헤엄쳐 간다 내 안에 또 하나의 고래 서문으로 펼쳐 놓고 슬픈 향기 한 줌 쥐고 태평양을 가를 때 눈물 없는 심연으로 새로운 장르 탄생한다 끝없이 돌고 돌아서 움직이는 섬이 되리 * 김기림 변용. - 출처; 『좋은시조』2021, 가을호에서

좋은 시조 20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