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258

나비 -류시화

나비                            류시화​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세상이 내게서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

좋은 시 2025.02.01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저 거리의 암자                                    신달자  어둠 깊어 가는 수서역 부근에는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주인과 손님이 함께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빗댄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속 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젓가락으로 집던 산 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 내지 못합니다답답한 것이 산 낙지뿐입니까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 버린 여자도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냅니다비워진..

좋은 시 2025.01.30

대숲 아래서 -나태주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대숲 아래서 ​​                            나태주​1바람은 구름을 몰고구름은 생각을 몰고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대숲 아래서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2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3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 자국,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4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동구 밖에 떠도는 애들의소리만이 내 차지다.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밤안개만이 내 차지다.​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이 가을,저..

좋은 시 2025.01.04

시인의 병풍 - 이성선

시인의 병풍屛風                  이성선 밤마다 나는반은 가리고 반은 드러난처용 아내, 고운 가랑이달 솟는 해협海峽에내려가  병풍을 치고신기스럽게 악기 소리 열리는병풍을 치고 꽃나무에 내려꽃잎을 열고 들여다보면밤중에 그는 미쳐 있을까  무의巫衣를 걸치고나와 산중을 드나든다.풀잎과 나무를 드나든다. 좌절挫折의 밤마다험준한 산악을 오르며울부짖던 음성도 절망에 쓰러져황혼을 수 놓다가 , 다시오지의 풀밭에 내려비밀히일월日月의 출몰出沒을 다스리던 그의 손도지금, 악기소리 삐걱이는 풀잎을건너내 가슴에 내려, 황홀히문채文彩의 비를 뿌리고 용들이 천공天空 가득포효하며 날으는병풍屛風 안 엄숙히 고개 숙인그의 침묵沈默 아래처용 아내 고운 가랑이해협海峽에,향香그러운 피리소리달이 뜨고, - 출처; 『이성선 시전집..

좋은 시 2024.12.18

경유지에서 - 채윤희

경유지에서 ​― 채윤희(2022년 신춘문예 동아일보 당선작)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약속한 땅은 그림 한 뼘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

좋은 시 2024.11.20

꽃무늬파자마가 있는 환승역

꽃무늬파자마가 있는 환승역                                                    허청미    이쁜 꽃무늬파자마 한 번 입어 봐요   봐요! 수천 개 달이 떠 있는 배밭, 배꽃들이 자지러지잖아요그 위로 물고기가 휙휙 나르고 연인들이 칸다루*처럼 입을맞추고 있잖아요, 환상적이죠? 이렇게 한 백년쯤 살아보고 싶다구요? 그래요, 천 년이면 어때요, 꽃무늬 잠옷을 입고행복한 미라처럼 살아봐요  그렇게 가로 막지 말고 오른쪽으로 좀 비켜주실래요?   시곗줄에 눌린 맥박이 초침처럼 뛴다   -꽃무늬 파자마 한 벌에 5,000원- 지하철 4호선과 7호선 환승 梨水역꽃무늬파자마들이 자지러진다  * 칸다루; 아마존에 서식하는 흡혈 물고기 -출처; 허청미 시집  『꽃무늬파자마가 있는 환..

좋은 시 2024.11.14

몰(歿) - 박주하

몰(歿)                                                                                   박주하​​숲은 나비의 운세를 접었다. 춘몽과 길몽 사이를 오가며 한가로이 춤을 출 것이란 말, 온 들에 꽃이 만발하였으니 그 향기를 탐낼 것이란 말, 그런 희망은 아무래도 미래에 닿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힘겨운 숨을 몰아 묵시(默示)의 수렁에 흘려 넣는다. 심호흡을 물방울에 적셔 후박나무 잎새에도 적어둔다. 햇빛을 쫓아 자리를 가려 앉는 나비의 잔등이 반짝인다. 저렇게 여리고 아름다운 등짝을 가진 자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되기 이전의 문법. 일생을 등만 보이며 목숨을 일군 이를 안다. 그는 미래를 가진 적이 없으며 미래를 원한 적도 없다. 미..

좋은 시 2024.10.27

파란 돌 -한 강

파란 돌                 한 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

좋은 시 2024.10.24

고통에 대한 명상 - 한 강

고통에 대한 명상                                        한 강     새를 잠들게 하려고   새장에 헝겊을 씌운다고 했다    검거나   짙은 회색의 헝겊을   (밤 대신 얇은 헝겊을)    밤 속에 하얀 가슴털이 자란다고 했다 솜처럼    부푼다고 했다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    기다린다고 했다   횃대에 발을 오그리고   어둠 속에서 꼿꼿이   발가락을 오그려붙이고 암전    꿈 없이    암전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눈 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출처; 계간 『문학과 사회』 2024, 가을호에서

좋은 시 2024.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