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조 202

독서의 함정

독서의 함정 박해성 헌책을 뒤적이다 신전에 들어섰다 긴 옷자락을 펄럭이는 신의 뒷모습에 휘요익 휘파람을 분다, 못 들은 척 멀어지는 그 바야흐로 꽃 피는 계절은 다 지났으나 사람들은 맨발로 구천을 돌아다닌다 몰라서 다행인 세상에 너는 밀입국한다 방패연처럼 가슴이 뻥 뚫린 늑대인간이 제단 앞에 엎드려 울고 있다, 두려워 마라! 주문도 쓸모없는지 신발 한 짝이 벗겨진다 멈추지 마라, 신을 버리고 계단을 오르는 너 돌아보니 소금기둥이 된 여자의 귓불에서 입술이 부르튼 초승달, 풍경소리로 흐느낀다 그는 시계 없이도 때 맞춰 별을 파종하는데 도대체 너는 왜 꽃처럼 피가 가려운가, 산발한 통성기도가 골다공증 신전을 맴돈다 출처; 『나래시조』 2021년 겨울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2.01.12

구봉도 가는 길

구봉도 가는 길 박해성 방금 떠난 버스를 눈으로 쫓는 정류장 염천햇살에 농익은 아스팔트가 낄낄댄다 여기는 어느 별일까, 어느 생에 살았을까? 천 년 전 이녁처럼 환히 웃는 해바라기 재회의 눈물 속에 노랗게 흔들리지만 모른 척 남의 일처럼 너는 버스를 기다린다 거품으로 만들어진 비너스의 심장인 양 하늘엔 뭉게구름이 부풀었다 흩어진다 행선지 낯선 차들이 잠깐씩 섰다 떠나고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다 등이 굽은 해바라기 그림자에 놀빛이 흥건한데 버스는 아직 소식 없다, 한 생이 다 지나도록 출처; 『정형시학』 2021, 가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1.10.24

이카루스의 질문

이카루스의 질문 박해성 아버지가 당부했어, 높이 날지 말아라 네 날개가 녹아내려도 태양은 죄가 없단다 그러나 활갯짓만이 내 존재의 이유였지 아버지, 대박부동산 낙원으로 모실게요 지금도 그 동네는 개천에서 용이 난대요 아들아, 검은 안경을 쓴 하이에나를 조심해 도솔천도 제석천도 아닌 용이 난 개천에는 무지갯빛 물방울이 주문처럼 흐른다네요 그 물에 발을 담그면 죄가 다 씻겨진대요 이판사판 주식신화 무단횡단 앞지르기에 날개가 찢어졌어요, 아버지 어디 계셔요? 추락은 연습이 없는 법, 보기에 좋으십니까? -출처; 『정형시학』 2021, 가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1.10.17

모로 누워 자는 날이 늘었습니다

모로 누워 자는 날이 늘었습니다 박해성 왼쪽으로 누우면 보이는 건 벽입니다 동통에도 고독에도 그저 싸늘한 거기 손가락 활짝 맞대고 초점 없이 응시합니다 이대로 눈 감으면 나 어디로 흐를까요? 인동초무늬 넌출대는 벽에 갇혀 누워있으니 발해의 무덤 속인 듯 주작이 날개를 털고 손가락 사이 열리는‘천상열차분야지도’ 1467개 별들이 사금파리같이 반짝입니다 지금 막 황도 12궁을 지나는 당신이 뵈는군요 생시인양 먼 산 보며 말없이 걸어가는 이 구천보다 깊은 적막에 묻힌 매미처럼 그 붉은 울음을 지고 아버지, 멀어집니다 계간 『발견』 32호, 2021년 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1.04.01

모란도

모란도 박해성 그가 떠난 서라벌에 가을비가 흩날린다 여자는 입술 깨물고 모란에 몰두한다 미친 듯 신들린 듯이 피는 꽃이 낭자하다 맹목의 백치인양 먹먹한 저 부귀영화 상투적인, 관념적인, 그러나 인간적으로 어쩌면 선덕여왕보다 더 외로울지 몰라, 여덟 폭 병풍 앞에 이별의 잔 마주 놓고 무명지를 깨물어 혈서라도 쓸 것을, 그녀가 붓을 헹군다, 한恨이라도 풀어내듯 - 한국동서문학 2020, 겨울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0.12.16

춘분

춘분 박해성 절도 탑도 사라진 황룡사 빈터에는 신라의 나비 같은 눈발이 분분한데 허공을 받드시는가, 돌덩이 앉아계시네 눈물로 왕을 보낸 불상도 불에 타고 가섭이 떠난 자리 연좌석만 남았건만 돌부처 앉아계시네, 생살에 구멍이 뚫린 봄이야 오든 말든 꽃이야 피든 말든 얼마나 많은 날들 묵언정진 하셨을까, 제 몸에 구멍을 모신 저 神께 절하고 싶네 - 2020 《정음시조》 2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0.07.24

끝물 모란이 질때

끝물 모란이 질 때 박해성 오월 어느하루 난설헌을 찾아간다 몰락한 친정 가듯 한 발 늦은 안부에 입술이 바짝 메마른 끝물 모란이 뚝뚝 진다 당신은 떠났어도 솔숲은 울울한데 기나긴 밤 울컥울컥 붉은 시를 토하시던 조롱 속 날개 상한 새 울음조차 스러지고 오늘은 서왕모와 깃털 수레 타러가셨나 한가로이 꽃을 꺾던 사내쯤은 아예 잊고 열 두 줄 햇살을 타는 초록이 창창하다 《정형시학》2020, 여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0.06.21

호작도虎鵲圖

호작도虎鵲圖 박해성 호랑이 한분 모신다, 정갈한 캔버스에 어리석은 중생의 붓끝에서 개안하시는 눈동자 검은 눈동자, 아차차! 사팔뜨기네 갈팡질팡 초점 잃고 한세상 헤매실라 호흡을 멈춘 채로 무릎 꿇고 점안한다 육식의 죄가 멋쩍어 딴청피우는 퉁방울눈 신의 나라 부적인 듯 얼룩무늬 무장하고 정글에서 산화한 월남전 맹호처럼 때로는 날랜 사냥꾼도 사냥감이 된다는데 버텨 앉은 앞발이 돌탑을 받친 연꽃 같다 점잖게 똬리를 튼 긴 꼬리로 중심 잡고 뉘 소식 기다리시나, 까치소리에 귀를 쫑긋 《정형시학》2020 여름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0.06.17

겨울비, 그 후

겨울비, 그 후 박해성 길바닥에 고인 물 속 고층빌딩이 누워있다, 노을빛 창문들이 전생처럼 아련한데 가로등 젖은 눈동자 조등인양 흔들린다 이녁 같이 저녁 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묵한 길의 상처가 우주의 중심인 듯 구름이 몸을 풀었다, 허락도 계산도 없이 몇 번을 죽었다 깨야 다시 인간이 될까? 신음처럼 울음이 새는 길고양이 한 마리, 미야오~ 번개 삼킨 듯 꼬리를 사리는데 유모차가 지나간다 영구차가 지나간다, 작은 새가 날아간다 소년이 뛰어간다 낯익은 무언극처럼 2막3장이 흘러간다 -월간 『시인동네』2020년 02월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0.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