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girl.
박해성
가방 위에 그려진 소녀가 윙크를 한다
한손으로 하늘 높이 흔들고 있는 핑크색 모자 위로는
파란 글자들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I am a girl’
나는 핑크모자가 없어 저 하늘을 날아 본 적 없는 걸
엄마야 누나야 강남 살자 졸라 본 적도 없는 걸
뱅뱅 우물 안에서 허우적대다가 솔잎이나 갉아 먹다가
불휘 기픈 나무 그늘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던 걸
어미의 머리채를 잡고 북처럼 두드리는 아비 앞에
언젠가는 면도날을 씹어 뱉으리라 벼르던 걸,
폼 나게 풍선껌을 부풀리며 야반도주를 꿈꾸던 걸
이번 정거장에서 가방은 내렸다, 흔들리는 시내버스 안
차창에 비친 산전수전이 불쑥 묻는다 - Are you a girl?
느닷없는 질문에 쩔쩔매는 걸 – I’m fine, and you?
우문우답이 무안해 시간의 뒷골목으로 달아나는 걸,
네 생일인데… 얘야 도시락에 달걀프라이를 싸줄까,
씨암탉으로 키워서 참외밭을 사자구요, 없는 건 많고
있는 건 없는 열일곱 살이 잘근잘근 손톱을 깨문다
달걀프라이만한 달이 뜬 하늘 아래 사춘기가 훌쩍인다
스톱 스토오옵 내려요, 창가에 달린 빨간 벨을 꾸욱 누른다
울컥, 버스가 선다 하마터면 한 정거장 더 갈 뻔한 걸,
<출처> 박해성 시집『우주로 가는 포차』2020,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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