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가죽소파 - 박해성
얼마나 먼 길을 걸어 나는 마침내
머리 검은 짐승의 마을에 도착했는가. 나무마다 주렁주렁
알전구가 열리는 불임의 시대, 붉은 외마디를 찢고
냉혈의 칼끝에서 환생한 나는 이 집 거실에 이십여 년째
묵묵히 엎드려 산다. 이건 굴복의 자세가 아니다, 다만
눈도 입도 버리고 오장육부 다 비우고 스스로의 내면과
조우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살갗이 갈라터지도록 나를
깔아뭉개는 자들은 본능을 거세당한 야생의 영혼을
읽을 줄 모른다. 지금 나의 유일한 신앙은 온전한 죽음뿐,
드디어 휘굽은 척추를 떠받치고 선 관절이 삐걱거린다.
이제 포유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네 다리로 초원을 주름잡던
종족의 품위는 끝까지 지켜내고 싶다.
나는 결코 무릎 꿇지 않으리라
햇살이 콧등을 간질이는 오후, 반백이 된 마돈나가
내게 기대어 책을 읽는다. 이따금 그녀가 자세를 바꿀 때마다
나의 뼈마디들은 통증을 잘게 잘게 씹어 삼킨다.
‘오직 독수리만이 태양을 볼 수 있다.’ 눈 먼 보르헤스 말에
그녀 밑줄을 긋고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득한 와디가 불면을 싣고 흐른다.
우기가 막 끝난 6월 세렝게티, 질주의 유전자에 들린 누 떼가
소파 곁을 스치듯 내달린다. 백 마리, 천 마리, 만, 십만
흙탕물이 튄다. 짓밟힌 야생화처럼 나는…
- 월간 『시와 표현』2017, 10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