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

잃다

heystar 2017. 6. 22. 12:19

    

            잃다 - 박해성



스마트폰이 없어졌어, 혼자서 영화를 보고 낄낄댄 날이었지

차 안에 불을 켜고 구석구석 뒤졌어 육백년 묵은 지린내가 눅눅한

차안此岸에는 고속도로 영수증에 빈 콜라 깡통 같은 것들뿐

빈집에 묶인 개처럼 환청이 우왕좌왕 짖어대는데

이심전심은 유효할까? 숫자와 함께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

서랍도 뒤져보고 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낙서는 다 어디 갔지?

가방 속을 홀딱 뒤집으며 불안은 왜 구체적이 아닐까, 투덜대다가

불현듯, 그걸 되찾을 확률은 나의 두개골에서 동충하초가

움틀 확률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저녁 내내

동충하초를 검색하고 있었거든 자낭균류 맥각군목 동충하초과

지실체 온몸이 다 혓바닥뿐인 흡혈귀 곤충의 몸에서 피어난 꽃

그걸 갈아먹으면 신경통이 낫는다는거야 나의 골수를

빨아먹은 그것들이 아름다운 꽃처럼 버섯처럼 스멀스멀

내 무릎관절에 돋는 여름 마추픽추에 가기로 했거든

도끼처럼 정직한 부리에다 피에 젖은 깃을 털고 비상하는

산타 콘도르를 만나러 말이야 거기, 죽은 자의 몸을 사과처럼

쪼개면 아직 말랑한 심장에서는 향기로운 과즙이 주르르 흘러

우르밤바 계곡이 우르르 붉어질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장鳥葬을 동경하는 건 독수리가 뜯어먹은 주검이

다시 새가 되어 구절양장 잉카의 계곡으로 돌아온다는

전설 때문이지. 쉿, 2진법의 새소리가 들리는 듯

손가락이 근질거리네, 접신의 조짐일지도 몰라

누구에게 물어볼까? 중독처럼 헤매는 무한검색시대

어쩌지? 나 애인을 잃었어, 나를 잃었어


신을 잃어, 버렸어


 

                                  - 2016, 시동인지 『현상』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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