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먹먹한
- 발해시편 2
박해성
그대 아직 동해에서 구름을 읽고 계십니까?
지금 나는 홀로이 발해에 당도했습니다.
내 누이 눈웃음 닮은 낮달이 수줍네요.
몸의 집을 버리고 마음만 훌쩍 챙겨오니
이제야 알 것 같네요. 내가 나의 감옥이었음을
발해는 그쪽보다 제법 더 춥습니다.
홍라녀* 피리소리에 어스름 번지는데 추워서 외롭습니다. 외로워 밤새도록
눈발이 흩날리는 황량한 벌판을 짐승처럼 헤맵니다. 때로는 어둠 속에 우뚝 선
고사목이 섬뜩한 자객만 같아 멈칫 물러서기도 했는데요. 간혹 정혜공주 스란
치마 스치는 소리에 나도 몰래 뒤돌아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엊그제는 지
린성에서 정효공주 무덤을 돌며 해서체 금석문을 그렁그렁 더듬느라 새도록 뒤
척였더니 몸살기가 도진 듯 신열이 오르내립니다. 한 생의 파란곡절이 고작 몇
줄 글자로 그렇게 요약되다니, 참으로 어이없어 울컥 동공이 뜨겁기도 했는데요.
언젠가 이 몸 떠나면 무어라 적힐 것인지…
* 거란에 포로가 된 발해의 왕세자를 적진에서 구출해낸 여자 무사.
- 현대사설포럼 2016, Vol,7 『문득, 먹먹한』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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