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수렵시대 - 김경후

heystar 2016. 3. 23. 18:08


                수렵시대


                                            김경후




사냥이 시작된다, 바람 한 점 없는 밤, 발자국 하나 없는 백지,


사냥이 시작된다, 검은 화살 꽂히는 곳, 이미 썩은 짐승, 이미


추락한 새, 창이 박힌 곳, 지난 밤의 폐허, 그러나 눈먼 사냥꾼,


숨을 멎고 백지 위,  내달린다. 붉은 먼지 속 검은 말발굽들, 내가


젖은 갈기를 잡았지, 혹은, 불끈 솟은 목덜미 정맥, 그 울부짖음을

 

잡았어, 그런 말들, 잡고 싶을 수록 허옇게 부서져버리는 말들, 고함


지를 수록 텅 비어가는 백지, 사냥이 시작된다, 칼을 휘두르며 달리고


또 달린다, 눈먼 사냥꾼, 백지는, 달리지 않는 모든 것을 한다. 눈표범


처럼, 포식자의 높고 깊은 눈빛으로, 달리지 않는 모든 것을 한다.


납빛의, 눈먼 사냥이 시작된다, 보이지도 않던 말들, 목을 물린 채


끌려가는, 숨소리, 이미 뿌옇게 잿가루 뒤덮인 사냥터, 그러나, 다시


바람 한 점 없는 백지 위, 눈먼 사냥이 시작된다,


 


-  제 61회『現代文學賞 수상시집2016, (현대문학) 에서




1971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현대문학》등단.

시집으로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열두 겹의 자정』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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