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청동거울 - 양해열

heystar 2016. 3. 13. 15:42

 

 

                           청동거울

 

 

                                                      해열

 

 

 

  나는 가끔 세월을 리모델링하고 싶다

  과거로 가는 입장료는 단돈 삼천 원, 자판기 입에 지폐를 물리면 청동기시대 행 버스는 온다 자동문 열리고 한 걸음 올라서면 타임캡슐 유리벽은 닫히고, 지하로 내려서는 에스컬레이터 알루미늄 계단이 동굴의 입을 만나 찢어지는 곳에서

  매트리스 세상은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횃불 일렁이는 신석기실 지나 마한 진한 거쳐 오백 년 또 오백 년

  묵은 시간의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깨진 농기구와 녹슨 수렵도구들이 발목을 잡는다

  퇴화된 날개 같은 다리를 끌고 얼마나 걸었던 것일까,

  나는 새 구두에 뒤꿈치가 벗겨지고 절뚝거리고

  그만 주저앉는다 오래된 마당의 집오리처럼 두리번거린다 나는 혼자다,

 

  앗! 출구가 사라졌다

 

  어둠 속 비린내 풍기는 물컹한 바람이 갈비뼈를 툭툭 치며 지나간다 사진촬영금지 푯말 속에서 번쩍, 터지는 플래시가 턱을 끌어당긴다 나는 허우적대며 손바닥으로 청동거울 낯을 문지른다 얇아진 녹의 더께에서 한 톨 불씨가 일자 봉황이 튀고 붕새가 날고 벽화 속 가죽옷 입은 짐승들이 울부짖는다 방울이 울리고 주문 외는 소리가 나프탈렌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다

 

  가늘고 긴 도마뱀꼬리에 묶여 미라 여왕이 앉은 제단에 나는 봇짐처럼 놓인다

  과거에서 돌아온 조가비 불가사리 소라껍데기 가면을 쓴 동삼3동 전입자들, 목에 돌도끼 돌칼을 들이대며 악령의 피 한 사발 쏟아내라고 다그친다

 

  때마침 전시실 밖에서 걸려오는 아내의 전화, 호주머니 속에서 텔미 텔미 핸드폰 벨이 터진다 혼비백산, 머리칼 휘날리며 흩어져버리는 반라의 사람들,

 

  그 틈에 철벽을 통과해 시푸른 얼굴로 다시 세상에 태어난

  나, 라는 거울, 언제나 당신

 

  때론 내재된 사랑을 리모델링하시라, 푸른 거울이 말했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월호 발표




1963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대학교대학원 국문과 석사 수료.

2006년 《애지》신인상 등단.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시집; 영산수궁가『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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