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 리뷰

박성민 평설 - 기억의 환유물로서의 시 읽기

heystar 2013. 12. 19. 15:49

  2012년 『화중련하반기호 <정예시인 특집>란에  - 내 작품 7편이 실렸다. 등단후 첫 특집이라 신중하게 작품을 선별했다.

어쩌나! 이제 꼼짝없이 시인이 되고 말았으니.....

         

 

[박성민 평설] 기억의 환유물로서의 시 읽기

 

   특정한 시대와 삶은 회상이나 환기라고 하는 기억 기제를 거쳐 시인들의 언어로 재현된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시인들의 글쓰기는 개인의 기억작용을 거쳐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방식을 취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기억작용을 거치는 순간 개인적 의미로서의 역사성을 얻기 때문이다. 

 

......... 중략 ................

 

 

흔든다, 덜컹 덜컹 하행열차 칸막이 문

세상 문 저리 힘겹게 여는 이 누구일까?

 

발톱이 돌돌 구르는 고물 유모차 나타난다

 

그 뒤 딸려 납신다, 구천 가신 울 엄니

마디뿐인 갈퀴손이 저문 생을 움켜쥐고

제풀에 몸을 낮춘다, 기역자로 굽은 허리

 

아찔한 속도 낯설어 비틀대는 한 줌 육신

속엣 말 털어놓듯 무릎마다 껌 놓는다,

더러는 두 눈 감은 채 묵언수행 삼매경이라

 

슬쩍 쥐어드리는 꼭꼭 접은 지폐 한 닢

가랑잎 같은 할머니, 내 손을 꼭 잡는다

신라 적

어느 시냇가

개짐 빨던 관음보살님

                                   -  박해성 <觀音, 전철에서 만나다>

 

   박해성 시인의 경우 기억은 역사성을 띤다. 이 시에서 시인은, 덜컹거리는 전철 안이라는 공간에서 고물 유모차에 껌을 넣고 파는 할머니 한 분에게 껌을 사드렸던 기억을 형상화한다. 칸막이 문이 힘겹게 열리면서 고물 유모차가 먼저 나타나고 거기에 의지한 채 껌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전철의 "아찔한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낯설어 비틀대는 한 줌 육신"을 바라보던 화자의 눈에는 그 할머니의 모습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할머니는 '속엣 말 털어놓듯" 승객들의 무릎마다 껌을 놓지만 승객들 대부분은 "두 눈 감은 채 묵언수행 삼매경"에 빠진 듯 모른 체하거나 조는 척한다. 그래서 화자가 "슬쩍 쥐어드리는 꼭꼭 접은 지폐 한 닢"이 고마운지 손을 꼭 잡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신라 적/ 어느 시냇가/  개짐 빨던 관음보살님"을 떠올리는 것이다. 관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이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면서 상상력의 자유로운 진폭을 보인다. 또한, 할머니=어머니=관음보살이라는, 삼중 액자에 해당하는 치환은유의 기법으로 이미지를 중첩하여 공감대를 형성한다.

 

목숨 팔아 귀족이 된 그를 본 적 있나요?

야생의 어금니가 아직도 근지러운지

백화점 유리관 속에 질겅질겅 권태를 씹는

 

터지는 활화산인 양 콧김을 내뿜으며

세속 진흙탕에서 막무가내 설치던 이

껍질만 달랑 남았다, 간 쓸개 다 빼 놓고

 

산다는 건 누 떼처럼 광야를 달리는 일

맹수에게 쫓기고 건기의 강도 건너지,

어쩌다 헛발 짚으면 다만 한 점 티끌인데

 

눈물샘도 말랐는가, 납작 엎드린 그대

비늘마다 콕콕 박힌 숨 가쁜 역광 아래

적도의 비릿한 밀어, 그 해웃값 쟁쟁하다

                                                               - 박해성, <악어의  눈물>

 

   도시의 물질문명 속에서 순수한 인간성을 상실한 채 하나의 전시된 상품으로 전락해 버린 현대인들을 풍자한 시다. 악어는 자신의 가죽으로 명품 가방이나 핸드백 등으로 화하여 귀족이 된다.  이 작품이 비판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삶을 잃어버린 현대인, 물질문명의 이기에 "밸도 다 빼버리고" 자신의 "껍질만 달랑"남은 채 전시된 명푼 악어가죽 같은 현대인이다. "백화점 유리관 속" 같은 물질문명 속에서 "질겅질겅 권태"나 씹어대는 현대인들도 젊은 날엔 "터지는 활화산인 양 콧김을 내뿜으며"열정적으로 살았던 적이 있고 "세속 진흙탕에서 막무가내 설치던"패기와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눈물샘도 말라 버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납작 엎드려 복지부동의 자세로 살아가는 현대인, 인간적인 순수성과 온정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자신의 영혼마저 상품화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스펙 쌓기를 통해 자신을 상품화하기 여념이 없다. 마지막 수 종장에서 '해웃값'은 기생과 관계를 가진 후 그 대가로 주는 돈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현대인들은 자신이라는 상품을 물질문명에 기꺼이 팔아 넘김으로써 재화를 획득하며 순수함을 상실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원적 가치의 대립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략 ..................  

 

   <드라큘라의 연인>에서는 시를 찾아 헤매는 시인 자신을, 미친 듯 홀린 듯 피를 찾아 헤매는 드라큘라의 연인으로 비유한다. "컹컹 짖는 어둠 속 굶주린 늑대가 우는" 시간은 시가 마음 속에 찾아오는 영감靈感의 시간이다. "은유의 망령들이 횡행하는 백지"라는 표현이 이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손톱 다 닳아빠지도록 밤새워 무덤을 파"야 하는 시인에겐 "재앙 같은 흡혈은 거역할" 방법이 없을까? 없다.

   고려 때 이규보가 <시벽詩癖>에서 괴롭게 읊조렸듯이 진정한 시인이란 시마詩魔가 붙어서 잠시도 놓아주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지는 갈증마저 만우절처럼 사랑"해야 하는 시인, 그 존재의 슬픔이 형상화된 시다.■  평설-박성민.

 

[출처]  『화중련』2012, 하반기호에서 

 

박성민 시인.

전남 목포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2013년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집 『쌍봉낙타의 꿈』

<21세기시조>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