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카의 길
최 승 호
원한 일도 없는데
온갖 물질들로 나를 만드시고
내게 붙여놓은 번호
나, 6969
나는 붕붕거리며 나아간다
누가 이 몸뚱이를 모는지 모르지만
아슬아슬 죽음을 비켜가는 길로
바퀴의 길로 나는 질주한다
길들은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상실의 헝크러진 길들은
개들이 오줌으로 점찍은 전봇대들은
다리 입구의 울부짖는 돌사자들과
주유소의 긴 고무호스는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길 위에서의
신경질적인 경적,
1초를 빗나간 죽음과
1인치 곁을 쌩쌩 스쳐가는 죽음을
누가 나를 몰고 가는지 모르지만
(그 분은 얼굴이 없으시고)
소음의 길에 소음을 덧보태며
나는 중고차가 되어간다
폐차장
그 부식해가는 고철더미 위에
어느날 나 6969도 뜯겨지고
또 무슨 일이 있나, 내가 없는데
쇠찌꺼기로 무수한 잔해인 내가 널려 있는데
재생의 붉은 쇳물 뜨거운
윤회의 공장에서
새 옷 입힌 고철들이 설레면서
렌트카의 길을 가겠다고 붕붕거리네
[출처] 최승호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에서 발췌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 1977년 《현대시학》 등단.
- 시집;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
- 산문집;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
- 그림책;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
- 수상;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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