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렌트카의 길 - 최승호

heystar 2012. 7. 5. 17:27

   렌트카의 길

 

                   최 승 호

 

 

원한 일도 없는데

온갖 물질들로 나를 만드시고

내게 붙여놓은 번호

나, 6969

나는 붕붕거리며 나아간다

누가 이 몸뚱이를 모는지 모르지만

아슬아슬 죽음을 비켜가는 길로

바퀴의 길로 나는 질주한다

길들은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상실의 헝크러진 길들은

개들이 오줌으로 점찍은 전봇대들은

다리 입구의 울부짖는 돌사자들과

주유소의 긴 고무호스는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길 위에서의

신경질적인 경적,

1초를 빗나간 죽음과

1인치 곁을 쌩쌩 스쳐가는 죽음을

누가 나를 몰고 가는지 모르지만

(그 분은 얼굴이 없으시고)

소음의 길에 소음을 덧보태며

나는 중고차가 되어간다

폐차장

그 부식해가는 고철더미 위에

어느날 나 6969도 뜯겨지고

또 무슨 일이 있나, 내가 없는데

쇠찌꺼기로 무수한 잔해인 내가 널려 있는데

재생의 붉은 쇳물 뜨거운

윤회의 공장에서

새 옷 입힌 고철들이 설레면서

렌트카의 길을 가겠다고 붕붕거리네

 

                   [출처] 최승호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에서 발췌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 1977년 《현대시학》 등단.

- 시집;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

- 산문집;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

- 그림책;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

- 수상;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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