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토르소 - 이장욱

heystar 2012. 4. 5. 20:01

         토르소

 
               이 장 욱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이 밤의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 이장욱 시집 『생년월일』(창비) 에서

 

- 1968년 서울 출생.

- 고려대 노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 1994년 《현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 평론집;  『혁명과 모더니즘』『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

- 수상;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

          2010년 제3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賞' 수상.

- 현재 '천몽' 동인이며 조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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