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남자
박 소 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띄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출처] http://cafe.daum.net/sogoodpoem
아현동 블루스
박 소 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
쇼윈도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 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 벌
쇼윈도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 계간 『창작과 비평』 2010년 가을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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