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 종 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
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
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
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
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출전] 도종환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중에서 발췌
-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마음의 쉼표」등.
- 신동엽 창작상, 2006년 올해의 예술상(문학부문),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을 수상.
- 2006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
-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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