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양의 유서
최 금 진
그 거미가 독신이었다는 사실이 인터넷 뉴스에 그물처럼 뻗어나갔다
단풍잎을 머리에 꽂은 깨진 보도블록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 거미는 시체애호증이 있었다고 했지만
파먹고 버린 추억 속에서
수박 같은 머리통들이 굴러다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음과 기꺼이 동침하고 껴안는 자세야말로 이 시대 종교인의 모범이 아니겠냐며
다소 황당한 진술의 대머리 목회자 잠자리 씨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자꾸 부르르 날개를 떨었다
불법으로 관절 치료를 하는 골목길 안마사 노래기 씨에 따르면
그 거미는 항상 운동 부족이었으며 자신의 틀에 박힌 우울한 사고가
마침내 오늘의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그 거미가 베란다에 목을 매고 죽은 채 발견된 건 어제 저녁의 일
빈방에 혼자 앉아 마지막까지 정규방송을 시청했을 거미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매일 그물을 깁는 어부를 생각했어요. 바다로 가라앉을 낡은 배에게도
여행의 자유는 있지 않겠어요. 어부의 불행이 어부의 성실함 때문은 아니잖아요.
그래요, 그물을 늘 품에 넣고 다녔어요.
아직 건져 올릴 사랑이 제게 남아 있다면 이렇게 외로울 리가 없어요.
나를 향해 그물을 던질 시간이에요. 잘 있어요.
거미의 유서가 인터넷 웹사이트를 타고 거미줄처럼 뻗어나가자
이를 미리 차단하지 못한 일부 대형 포털사이트들은 서둘러 공개 성명서를 냈다
거미 양의 자살에 애도를 보내며...
거미 양 관련 기사는 일부 여행자들의 자살을 부추길 우려가 있어 차단키로...
계간『시로여는세상』2009년 가을호 발표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 1994년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 1998년 제4회 <지용신인문학상>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 시집 『새들의 역사』(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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