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장롱
이경림
아버지, 살구씨 하나를 뜰에 심었는데 왜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장의 떡잎이 나오나요
그 속에 무슨 손이 녹두 같은 싹 같은 것 터트려
허공으로, 허공으로 치솟게 하나요
햇살 속으로 이슬 속으로 소나기 속으로 막 달아나게 하나요
문득 비 그친 후, 노란 김 피워 올리며
아기 살구 몇 매달게 하나요
떡잎에서 살구까지 몇 리나 되는지 나는 몰라요
막 달아남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몰라요
거기 가면 온전히 살구나무인 살구나무가 있을 것도 같아
막 달아나는 저 살구나무의 속도를 흉내도 내 보지만
끝내 그건 살구나무 아니면 아무 모르는 살구나무 장롱 속의 일
폭양이 황금빛 살구들을 떼로 몰고 오는 저녁이예요 아버지
장지문을 열면, 신내를 확 풍기며 달려드는
미친년 같은 살구나무 한 그루가
꼭 살구나무만한 그림자에 싸여 흔들리는 데요……
자꾸 왜냐고 물으면
그 또한 꼭 살구 씨 한 알만한
장롱 속의 일 아니겠느냐고
이경림시집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문예중앙, 2011) 에서
1989년 계간 《문학과 비평》〈굴욕의 땅에서〉외 9편 등단.
시집『토씨찾기』(생각하는 백성, 1992) ,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세계사, 1995) ,
『시절 하나 온다, 잡아 먹자 』(창작과비평,1997), 『상자들』(랜덤하우스중앙, 2005),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문예중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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