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끝과 시작

heystar 2020. 8. 30. 15:14

      끝과 시작*

                   이상국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선덕여왕 시절부터 중천을 떠돌던 내가

어느 날 발 크고 소리 잘하던 정선 여자

내 어머니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뛰어들어

늙은 시인이 될 줄은 몰랐어

그래도 그게 어디냐

벌레도 아니고 마소도 아니고

그것도 노래하는 사람이라니

어머니를 잘 만났지만

공일마다 찬송가를 부르러 다니면서

쓰레기 같은 구호물자를 타 왔다고

예배당에 못 다니게 하던 아버지도 있었고

함부로 던진 돌멩이에 맞아 코피를 흘리며

아직 내 뒤를 따라오는 소도 있어

오, 생 하나가 고작 이런 것으로 가득하다니

그래도 그런 나를 어떻게 피해 가겠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데

어제는 내 자리에 차를 댔다고

옆집 남자에게 욕이나 해대는 이런 나를 누가 알겠어

다른 건 되어 본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나도 내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그래도 실없는 나의 노래가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진 몰랐어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제목

 

-출처; 계간 《애지》2020, 가을호에서

 

- 시집; 《집은 아직 따듯하다》《뿔을 적시며》《달은 아직 그 달이다》등.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그릇 경전  (0) 2020.10.03
밤의 주유소  (0) 2020.09.11
순정 또는 공룡  (0) 2020.07.17
꽃의 정치  (0) 2020.07.10
갈대는 배후가 없다  (0) 202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