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순정 또는 공룡

heystar 2020. 7. 17. 12:45

            순정 또는 공룡

 

                                 이화은

 

 

   한때 이 지구에

   순정이라는 동물이 살았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은 없다

 

   화석이나 발자국으로

   그 모양이나 크기를 추정해야 하는

   공룡 같은 건지도 몰라

   쿵쿵쿵

   지축을 울리며 환청처럼 다가왔다

   사라지는 상상 속의,

   가장 높은 가지에 달린

   여리고 푸른 잎만 골라 먹는

   고고한 초식동물이라고도 하지만

   이빨이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는 설도 있다

   흘러간 시인들의 자서전이나

   헌 책방의 고서 속에서 가끔

   그가 살았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

   살아 있는 선배 시인들의 눈동자에서 설핏

   추억 같은 그 동물의 그림자를

   엿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한 건 지금은 없다는 거다

   베스트셀러 시집에도

   쉬! 쉬! 떠들썩한 연애 사건에도

   자취를 감춘지 이미 오래

   몸집에 비해 머리통이 작아

   머리가 나빠 멸종했다는 그는 정말 공룡일까

   저 낯설고 그리운 이름을

   그냥 공룡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지금은 없지만 분명 한때는 있었던,

 

     출처 <유심> 2014, 6월호에서

 

시집;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 하다』 『미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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