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갈대는 배후가 없다

heystar 2020. 7. 1. 18:24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존재의 탈속을 위해

 

 

- 출처; 임영조 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세계사)에서

 

 

1945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

서라벌예대 문에창작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에 시<出航>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木手의 노래>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바람이 남긴 은어』, 『그림자를 지우며』,『갈대는 배후가 없다』,『귀로 웃는 집』,『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시인의 모자』와 수상시집 『고도를 위하여』,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 등을 출간.

1994~1996년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과 2002~2003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장을 역임

1995부터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교수로 출강.

1991년 제1회 '서라벌문학상'과 1993년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2003년 췌장암으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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