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밥그릇 경전

heystar 2020. 10. 3. 06:33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 놓았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출처; 이덕규 시집 『밥그릇 경전』 2009, 실천문학사

 

시집  『밥그릇 경전』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놈이었습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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