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별의 각질 - 이병률

heystar 2011. 5. 17. 11:57

 

            별의 각질

 

 

                                          이 병 률

 

 

 

애초 내가 맡은 일은 벽에 그려진 그림의 원본을 추적하여 도화지에 옮겨 그리는 일이었다.

부러진 가지 끝에 잎이 달렸을까

이 기와 끝으로 매달린 것이 하늘이었을까

하루 이틀 상상하는 일을 마치고 처음 한 일은 붓으로 벽을 터는 일이었다.

벽에다 말을 걸 듯 천천히.

 

도저히 겹쳐지지가 않는 다른 그림이 나왔다.

누군가 흰 칠을 해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여 벽 한 귀퉁이를 분할한 다음 붓으로 다시 열흘을 털었다. 연못이 그려져 흐르고 있었다.

 

다시 다른 구석을 닷새를 터니 악기를 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성지기가, 죽은 물고기가 올려져있는 천칭의 한 쪽 모습도 보였다.

 

흰 칠을 하고 바람이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지워지면 다시 흰 칠을 하여 그림을 올리고,

 

다시 흰 칠을 하고 그림을 그려 흰 칠과 그림이 누대를 교차하는 동안,

강이 불어나고 피가 튀고

폭설이 내려 수천의 별들이 번지고 내밀한 것처럼

밀리고 씻기고 쓸려져 말라갔던 벽.

 

벽을 찔러 조심스레 들어내어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육백여 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수십 겹이라는 사실에 미어지는 걸 받치느라 나는 가매지고 무거워진다.

 

책 냄새를 맡는다. 살 냄새였던가.

                                                                                            (<현대문학>2006년 1월호)

1967년 (충청북도 제천)
                     -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 2006년 제 11회 현대시학 작품상
                     - 저서: 시집 <당신은 어디로 가려한다> <바람의 사생활>
                               산문집<끌림>

                     - MBC FM4U 이소라의 음악도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