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

배꼽에 관한 단상

heystar 2017. 5. 17. 14:41


배꼽에 관한 단상 - 박해성



눈뜨면 습관적으로 컴퓨터 배꼽을 누르지요

오늘 우산을 갖고 나갈까요? - Enter

언제부터인가 나는 어머니에게 묻던 걸 컴퓨터에게 묻지요

그래서 이제는 컴퓨터를 ‘어머니’라 부르고 싶어요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밤사이 세상엔 별일 없었나요?


유디트가 잠든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구나, 카라바조를 조심해

그는 너를 목격자로 현장에 그려 넣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살인이 아니라 애국이라니, 나라를 구하려면

제물이 필요한가보다, 봐라 지금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구나 

  

오, 모르는 게 없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를 닮고 싶어요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 같은 능력 있는 의사를 찾아보아라

그가 토막 낸 시체에서 2진법의 DNA를 가진

싱싱한 배꼽들을 얻을 수 있을거야 하지만

우리끼리의 비밀은 꼭 지켜야 한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하이퍼링크만 따라가면 그런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죠

지금은 심장 없이도 살 수 있는 21세기,

머리나 가슴 같은 건 필요없죠 이젠 누구나

손가락으로 생각하니까요,

머리를 텅텅 비울수록 메모리 용량이 커지거든요


보세요, 벽을 뚫고 어머니 몸속으로 이어진 220V의 탯줄,

당신의 젖을 물고 과식하는, 멀미하는 착한 양

오, 때로는 토할 것 같은…

당신은 죽고 싶어도 날마다 다시 태어날 거예요

악령 들린 마녀처럼,

 


                       - 2016, 시동인지 『현상』 수록


'박해성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르헤스 식으로  (0) 2017.06.08
동판지에서  (0) 2017.05.21
맘마미아  (0) 2017.05.18
불량 샴푸  (0) 2017.05.14
시가 되는 저녁  (0) 2017.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