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되는 저녁 - 박해성
청소를 시작합니다, 로봇청소기가 말하네
맛있는 밥을 시작합니다, 밥솥이 말하네
세월이 점점 가라앉고 있습니다, TV가 말하네
나도 점점 목젖이 가라앉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저녁
말이 안 되면 시가 된다고 누군가 말했네, 그럼 오늘은
시 판이네, 뭐? 시팔이라고? 가는귀를 먹었는지 그가 역정이네
오냐, 시판이고 씨팔이고 욕설처럼 살아보자 꾸역꾸역
밥을 먹네, 찌개가 너무 짜잖아 그가 왈칵 맹물을 붓네
나 물 먹었네, 수학여행 아해들도 너무 짜게 먹었는지
물속에서 나오질 않네, 저대로 세월을 초월하는 건 아닌지 몰라
그가 초를 치네, 나는 그만 입안이 시고 떫어 숟가락을 내려놓네
어떤 대감나리는 무릉도원에서 수행중이시고 어떤 내시들은
골프 삼매라 기타 등등만 맹골수로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는데
충전이 필요합니다, 마미탱고로봇 청소기가 눈이 빨개서 서두르네
더러는 이상하게도 왈왈 개소리네 똥개 짖는 소리에 한눈 판 사이
삐리릭, 바퀴를 점검해주세요, 충전기를 향해 돌아오던 탱고가
SOS를 치네 삐리삐리삐리릭삐이 숨넘어가네 옴짝달싹못하네
얼른 쫓아가 청소기를 확 뒤집네 아, 뒤집힌 세월, 처럼
배 바닥이 드러난 로봇, 전깃줄에 발목이 감겼네 삐이이이…
기어이 방전 된 탱고는 이제 잠잠한데 사람들은 조각조각
조각난 제 심장을 뜯어 벽에 붙이기 시작했네, 노랑심장 파랑심장
찢어진 심장 나란히, 우산을 잃은 아해들이 학교 길에 나란히
노란 리본으로 돌아오네, 흰 국화로 돌아오네, 저 저 저…
충전을 시작합니다, 마미는 충혈된 눈을 자꾸만 껌뻑이네
- 시동인지 『현상』2016,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