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

불량 샴푸

heystar 2017. 5. 14. 03:41


불량 샴푸 - 박해성



잠결에 머리를 벅벅 긁는다 잠이 툭툭 끊어진다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이토록 가려울까

긁어도 긁어도 감질난다 손가락 끝에서 빠져나온

검은 실뱀들이 침대 밑으로 달아난다 사방으로 숨어든다

한 마리가 잽싸게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아, 징그러워!

비명에 놀란 달이 방바닥에 쓰러진다 목이 길고 푸르다

허물만 남은 달을 안고 나는 조금을 건너 사리로 간다

해풍이 상어 떼처럼 달려든다 내 몸을 다 발라먹고

뼈만 남길 것 같다, 샴푸를 바꿔야겠어


잠의 변방이 달의 분화구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어지럽다

방부제에 중독된 꽃들이 분열증처럼 피어나는 거기,

눈 뜬 자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묵계가 있었으니

깨어나지 마라, 가려운 머리통은 삿되고 헛된 것이라

뇌리 속 똬리 틀었던 파충류에 지느러미가 돋는 징조이니

불량한 것은 불온하고 불온한 것은 불안하다

그래, 저 샴푸를 버리자!


몽유의 숲을 탈출하지 못한 뱀들이 시커먼 분화구로 빨려든다

악착 같이 내 어깨를 물고 늘어지거나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눈치 보는 놈들도 있다. 허나 구멍의 식욕은 윤리적이라

검은 것과 흰 것, 날것과 익은 것 그리고 고뇌하는 것과

꿈꾸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깨끗이 삼켜버린다


몸통을 절반쯤 먹힌 잠의 꼬리가 꿈틀, 허공을 휘젓는다



                                                               - 계간 『애지』2017,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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