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10편의 『三國遺事』4~5편
박해성
4. 연오랑과 세오녀
▶ 단락 개요
신라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丁酉年(157)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갑자기 나타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자 일본 사람들이 그를 欽慕해 왕으로 추대했다. 남편을 찾아 헤매던 세오녀 역시 바위에 실려 일본에 가서 부부가 相逢했고 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는 異變이 일었는데 신라왕은 해와 달의 精氣를 되찾기 위해 두 사람에게 史臣을 보내 돌아오기를 청했다. 그러나 연오랑은 그들이 일본에 가게 된 것이 하늘의 뜻이라며 貴妃가 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일러주어 史臣을 돌려보낸다. 사신이 돌아와 그대로 하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찾았다고 한다.
▶ 감상 포인트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초기부터 우리나라와 일본이 人的交流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일본인들이 연오랑을 보고 ‘此非常人也 乃立爲王’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당대 우리 祖上의 人品이나 智慧가 일본인들을 능가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文字 그대로라면 그저 평범한 漁村 백성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후 ‘是時新羅日月無光’ 했다면(물론 현대에는 일식과 월식의 자연현상으로 인식하지만) 그들은 해와 달을 관장하던 바다의 龍神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왕이 일개 평민을 부르러 사신을 외국에 보내겠는가? 또한 貴妃가 짠 비단이 効驗을 발휘했다면 그女는 인간의 生을 織造하는 神이거나 橫厄을 막아주는 一種의 守護神이 아니었을까....? 유추할 수 있겠다.
5. 智哲老王
▶ 단락 개요
신라 22대 智哲老王은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智大路이며 시호는 智證이라 했으니 이때부터 諡號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왕을 麻立干(頂上을 뜻하는 尊號로서 왕에게만 쓰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王陰長一尺五寸’ 으로 배필을 구하기 어려웠으나 신장이 7척 5촌이나 되는 북 만한 똥 덩어리의 주인공을 찾아내 혼인하였다.
한편 阿瑟羅州 동해 속으로 바람을 타고 이틀정도 가면 于陵島가 있는데 둘레가 26,730步였다. 섬의 오랑캐들은 臣下노릇을 하지 않고 교만하므로 왕이 朴伊宗에게 命하여 그들을 討伐하게 하였다, 오랑캐들은 항복하고 왕은 박이종을 그곳(于陵島)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 감상 포인트
智哲老王에 대한 기록은 울릉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큰 빛을 발하는 부분이었다. 그의 陰莖의 길이나 황후의 체격에 대한 언급에서 느낄 수 있듯이 스케일 또한 超人的이었으리라는 느낌이 압도적이다. 또한 諡號나 尊號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음으로 알 수 있듯이 그 자신의 自矜心 또한 대단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自矜과 큰 스케일의 統率力으로 于陵島를 평정했다면 이는 틀림없이 신라의 영토가 아닌가. 昨今, 일본과 이 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이렇듯 땅덩이의 크기까지 세밀하게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라 기록해 놓았으니 더 이상 曰可曰否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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