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가슴으로 읽는 10편의 『三國遺事』6편 - 박해성

heystar 2015. 10. 27. 15:54

             가슴으로 읽는 10편의 『三國遺事』6편

 

                                                                   박해성

 

 

6. 太宗 春秋公

 

단락 개요

     신라 29대 太宗大王은 이름이 春秋이고 성은 金씨이며 왕비는 김유신의 막내 누이인 문희다. 진덕왕 死後 즉위한 춘추공은 8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59세에 사망했다.(661년) 왕은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큰 공로를 세웠으며 백성들의 생활이 풍요로웠으니 廟號를 太宗이라했다.

     이때 백제는 의자왕의 시대였다. 그가 왕에 卽位한 후 술과 여자에 빠져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충신 성충이 간하다 옥사하고 이어서 나라 안에 해괴한 일이 猖獗한다.

한편 신라의 태종(무열왕-김춘추)은 백제의 소식을 듣고 당나라에 援軍을 청하여 백제정벌을 시도했다. 의자왕은 항복하고 태자를 포함한 2,807명이 당나라로 보내졌다. 포로가 되어 당나라에 도착한 의자왕은 질병으로 죽었다.

 

감상 포인트

     이 이야기는 좀 길었지만 많은 역사적 사실을 示唆하는 것 같아 선택했다. 이를 나름대로 간결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김유신의 사람 됨됨이를 재조명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 우리는 여지껏 천하의 화랑이요 名將으로 알고 있었던 그가 누이를 이용하여 立身하려는 智略的 면모라던가, (물론 신빙성은 考證되지 않았지만) 당나라 군사들에게 毒酒를 마시게 해서 죽게 하는 등의 非人間的인 행위는 아무리 救國의 一念이라해도 合理化될 수 없는 비열한 행위이다. 현대의 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둘째로 當代 여성의 사회적 立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 즉 문희가 스스로를 담보로 춘추공에 접근한 것은 단지 사랑이었을까, 아니라면 그만큼 여성이 사회적 지위나 정치에 야심이 있었다는 이야기일까? 그도 아니라면 적극적 자유연애의 용기로 보아야 하는가? 또한 그녀의 임신사실이 가족의 마음대로 火刑에 처할 수 있을 만큼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지킬 制度的 권리가 없었을까? 등등......... 언제부터 여성이 “人間”이었을까? 하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로 전체적인 文脈에서 전해지듯이 우리 先祖들의 事大主義思想이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일이 列擧하기도 편치는 않지만 간단히 몇 가지만 擧論하자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位相이 그렇고, 신라궁중에서 사용하던 중국의 衣冠과 牙笏이 그렇고, 당나라 황제가 신라왕의 稱號를 트집잡는 것 등등이 자존심 상할 정도로 마음에 걸린다.

 

넷째로 이는 내가 가장 注目한 부분으로서 百濟敗亡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의자왕에 대한 서술은 몇 번을 읽어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우선 그는 “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라고 처음에 소개된다. 그러나 아무런 설명 없이 왕위에 즉위하자 곧 바로 “ 耽 酒色 政荒國危 ”라고 했다 - 海東曾子라 불리웠을만큼 용맹스럽고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깊던 한 사람의 훌륭한 인품이 어느 날 느닷없이 酒色에 빠져 나라를 망친 망나니 꼴이 된 것이다. 이야기 중간에 실린 의자왕의 여러 失策은 모두 愚昧기만 하고 한 나라의 지배자로서의 면모는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사실이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의자왕 死後 중국에서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자국의 歷代 王祖와 나란히 무덤을 쓰게 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당시 의자왕이 敗亡國의 포로신세였음에도 그 정도의 禮遇를 중국사람들에서 받았다면 그의 인품은 “ 海東曾子“라 한 것이 틀림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역사는 勝者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三國統一> 云云한 부분이다. 신라와 백제는 완전 個體의 독립국가 체제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外勢(당나라)를 끌어들이고 고구려의 領土를 당나라와 나누어 갖는 등의 治世는 신라 지배세력의 편협한 안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와 국가 간의 거래는 영원히 友邦일수는 없는 것이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自充手를 두고 '삼국통일의 偉業' 운운하는 것은 아무리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해도 合理的이라 할 수 없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