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가슴으로 읽는 10편의 『三國遺事』7~8편 - 박해성

heystar 2015. 10. 30. 22:30

                가슴으로 읽는 10편의 『삼국유사』7~8편 - 박해성

 

『三國遺事』 卷二 : 紀異 第二

 

7. 南부여 ․ 前백제 ․ 北부여

 

단락 개요

     《삼국사기》- 졸본부여 왕의 둘째딸과 혼인한 주몽(추모왕)의 큰 아들 비류는 미추홀에, 작은 아들 온조는 위례성에 都邑을 정하고 온조는 백제의 始祖가 되었다. 조상의 系譜가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서 나왔다하여 解를 姓으로 삼았다.

     《고전기》- 동명왕의 셋째아들 온조가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都邑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3대 근초고왕 元年(371년)에 고구려의 南平壤을 취하고 北漢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22대 문주왕(475년) 웅천으로 도읍을 옮기고, 26대 성왕은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國號를 남부여라 했다. 31대 의자왕 즉위 20년- 신라 김유신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여 평정시켰으니 이때는 건국이후 120년이 지났다.

 

감상 포인트

     각기 다른 史書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주몽=추모왕=동명왕>이란 等式이 성립되고 그 아들로서의 順位는 다르지만 온조가 백제의 始祖임은 틀림없는 사실로 증명된 셈이다.

     아쉬운 점은 백제왕들에 대한 이야기는 開國부터 滅亡까지가 신라 歷代 왕의 記述처럼 세세하지 않다는 점이다. 120년의 세월이 한편의 짧은 이야기로 압축되어졌다는 것은 몇 편의 다른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너무 虛妄한 역사가 아닌가.....

     한편 原典에 의하면 “ 百濟國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二百濟城 七十六萬戶”이던 것을 당나라가 5 도독부를 두고 다스렸으며 뒤이어 신라가 모두 倂合하여 3주 및 여러 郡縣을 설치해 다스렸다하니 두 나라가 백제 땅에서 벌인 角逐戰을 가히 상상할만하다.

이외에 바위에 대한 雜多한 이야기들은 野史인 듯 하면서도 ‘소정방이 낚은 용이 앉았던 바위’ 라는 등의 사대주의 개념이 엿보이기도 한다.

 

 

8. 후백제의 견훤

 

단락 개요

     견훤이 어렸을 때 부모가 농사일을 하느라고 들에다 뉘어놓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이렇듯 그는 평범하지 않게 성장하여 裨將이 되었다. 신라 진성왕 6년에 국가의 紀綱이 문란해지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견훤은 謀叛에 성공하여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획득했다. 이때 北原에서는 궁예가 도적 良吉에게 投降했다. 견훤은 民衆을 糾合해 백제의 再建을 꿈꾸고 마침내 후백제를 세웠다.(900년)

     한편 戊寅年(918년) 철원경에서 태조가 보좌에 등극하여 견훤과 맞서게 되었다. 丁亥(927년) 9월 견훤은 신라를 습격하여 신라의 王權을 無力化시켰다. 태조는 신라를 도와 견훤과 맞섰으나 김락과 신승겸 등의 장수를 잃고 敗했다. 이후 견훤은 태조와 友好관계를 맺고자 편지를 보냈으나 그 내용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이에 태조 역시 回信을 보내는 등 둘 사이의 긴장은 견훤이 滅亡하여 태조에게 依託할 때까지 오랫동안 지속된다. 견훤은 신라의 臣下로 출발해 892년에 후백제를 일으키고 936년에 이르니 45년 만에 멸망했다.

 

감상 포인트

     『삼국유사』의 대부분이 신라의 이야기인데 비하여 백제의 이야기는 微微한 편이었다. 그러나 <후백제 견훤>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후백제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신라의 敗亡과 고려의 建國은 물론 나아가서는 견훤의 활동범위를 통한 삼국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特記할 것은 全文(?)이 실렸다고 보는 견훤과 태조의 書札이다, 이는 그들의 개인적 인품은 물론 당시 사회배경과 백성들의 慘狀은 물론 전쟁의 명분을 찾는 지배층의 가치관의 片鱗을 엿볼 수도 있었다. 또한 견훤과 태조의 가족사를 통해서는 당대의 가족제도나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을 읽을 수 있다 하겠다.

     권력도 맛들면 중독된다했던가, 遺事에 기록된 견훤의 모든 惡行은 不遇한 그의 終末에도 불구하고 잔인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나 잊지 말자, 이 또한 스스로 무릎 꿇은 신라를 同情하고 견훤의 후백제를 敵對視하던 고려인의 기록이 아니었던가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