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 110

202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산 사​ 최원준​​범종 소리에​겨울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송백에 남아 있던 가느다란 푸른 선이 흔들리고​밤을 지켜보던 소쩍새 눈동자 흔들리고​범종 소리는​옹송그리며 가지에 점으로 앉은​꽃봉오리를 툭 하고 건드리고​툭 하고 밀치다가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그리하여​범종 소리에​소스라치게 놀란 매화나무는 가지에​꽃을 점점이 피워낸다.​ ​고요가 있고, 적막이 있고​그 속에 소란이 있고​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범종 소리에​계곡은 파문을 일으키고,​바람 따라 그 소리 배회하다가​팔상도 쓰다듬으며​부처님 안전에 매화향 전해주면​범종 소리에​밤은 끝을 비추고​동쪽 산은 붉은 점안식 준비를 재촉하였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신춘문예 시 2025.01.02

202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디스토피아 백아온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들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에는 항상 쇼 원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잠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

신춘문예 시 2025.01.02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드라이아이스 -결혼기념일 민소연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

신춘문예 시 2023.01.02

202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202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귤이 웃는다 백숙현​ ​ ​ ​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 외투를 벗었다 ​ 양말을 벗었다 ​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 벽이 눈물을 흘렸다 ​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 창문은 창문 ​ 탁자는 탁자 ​ 술잔은 술잔 ​ 귤은 귤 ​ 그러므로 나는 나 ​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 저울과 모래시계와 ​ 금이 간 거울 ​ 때 묻은 경전과 ​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

신춘문예 시 2023.01.02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 이예진 ​ 금값이 올랐다 ​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

신춘문예 시 2023.01.02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편 멜로 영화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신춘문예 시 2023.01.02

202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남신문 시 당선작 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

신춘문예 시 2022.01.16

202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상일보 시 당선작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신춘희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 같은 거아 이들 모두 돌아간..

신춘문예 시 2022.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