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푼어치 연민이며 8할 넘는 호기심 속
노약자석 모로 누운 그 여인 만삭이다,
황야를 질러왔는지 갈라 터진 맨발이다
진딧물 낀 들꽃같이 말라붙은 입술에다
신탁의 달을 품고 홀로 익는 개똥참외
차라리 달지나 말 걸, 귀머거리 막돌처럼
2.
마디마디 통증으로 덜컹대는 이승 열차
미쳐(狂)야 미치(達)는가, 아득한 적멸역에
진종일 쳇바퀴 돌 듯 순환선 또 출발한다
- 박해성 <개똥참외> 전문 (『나래시조』2012, 여름호)
박해성은 '창의력'이 탁월한 시인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관점 바꾸기를 통하여 새로운 시각을 갖는 박해성은 '상투성'을 거부한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새로운 내용뿐만 아니라 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계까지도 포함된다. 박해성의 '새로움'은 치열한 실험정신을 통한 창의력에서 나온다.
박해성은 지하철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시적 대상을 찾아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던 박해성의 감각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마침내 '개똥참외' 하나를 거머쥐고 나온다. 사물 또는 현상에 대한 생각의 방향을 실험적으로 비틀거나 바꾸어 찾아낸 값진 결과였다.
박해성은 시적 화자의 눈을 통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임신한 여인, 개똥참외를 "서푼어치 연민"과 "8할 넘는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시조는 현실세계와 아주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박해성의 시조는 현실 속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노약자석"에 "모로 누운" "만삭의 여인"이 있는 현실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화자는 그여인의 모습을 "황야" 와 "갈라터진 맨발"이라는 언어를 끌어와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 여인이 고단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첫째 수 종장에서의 이런 암시는 둘째 수 중장에 등장하는 "개똥참외"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유사성에서 출발하는 은유를 위해 둘째 수 초장에서 시적 화자는 다시 한 번 "진딧물 낀 들꽃 같이 말라붙은 입술" 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둘째 수 중장에서 화자는 잠입한 현실 속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마침내 화자는 "신탁의 달을 품고 홀로 익는 개똥참외"를 보여준다. 첫째 수 중장의 "만삭"과 "여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둘째 수 중장의 "신탁의 달"과 "개똥참외"로의 이미지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수 종장에서 화자는 "차라리 달지나 말 걸, 귀머거리 막돌처럼"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안쓰러운 심정을 나타낸다. 초장과 중장에서 묘사를 한 후 종장에서 정서적 진술을 하는 '선경후정'의 전통적 작시법이 실험적 내용을 통한 창의력과 조화되면서 시조를 시조답게 하는 '시조성'을 갖게 한다.
'2'로 표시되는 셋째 수에서는 더욱 확장된 이미지의 변주를 보여준다. "마디마디 통증으로 덜컹대는 이승열차"가 보여주는 표층의 이미지는 차고 넘쳐 '개똥참외'인 '만삭의 여인'으로 흘러들어 심연의 깊이에 가 닿는다. 상상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초장의 '이승 열차'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의미의 확장 혹은 전이를 발생시켜 만삭의 '여인'에게로 옮겨진다. 다시 말해 심층적인 층위에서의 '이승 열차'는 뼈마디가 덜컹댈 만큼 아픈 '여인'을 의미한다. 이런 고통은 '만삭'으로 인한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만삭'으로 상징되는 고통의 의미를 확장하면 그 고통은 서민의 모든 '현실적 삶'에의 고통일 것이다. "미쳐(狂)야 미치(達)는가"는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현실적 고단함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미쳐야만 닿을 수 있고 갈 수 있는 "적멸의 역"이다. 박해성은 이러한 고통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이상향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시인 자신의 '시적 세계관"일 뿐 현실은 다시 '황야'같은 삶과 터진 '맨발'로 계속 가야만하는 길임을 인식한다. 종장에서 시적 화자는 "쳇바퀴 돌 듯 순환선 또 출발한다" 라고 아프게 말하지만 그 문면 속에는 새로운 삶에의 꿈과 희망이 배어 있다. 길가 혹은 들 같은 곳에 저절로 생겨난 '개똥참외' 같은 서민의 고단한 삶을 '만삭의 여인'을 통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한 박해성의 시조 <개똥참외>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 - 글쓴이 ; 배우식.
[출처] 『나래시조』2012, 가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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