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수상작

제 2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작 - 안민

heystar 2013. 6. 20. 12:01

    2013'    제2회 웹진 시인광장 新人賞 公募 당선시       

 피아 외 4편  

                        안 민

 

 피아노가 죽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피아노다

  몸 안에 현이 심어져 있다 눈을 감으면

  캄캄한 기억 속을 방문하는 창백한 소녀

  손가락 사이에서 푸른 새들이 난다

  손톱에는 붉은 꽃잎이 비치고

  에테르, 너울거리며 밀려오는 에테르

  나는 피아노 선율처럼 흘러온 것이다

  악보 같은 차트를 흔들며 들어서는 흰 가운들

  저들은 왜 검은 빛을 흘리는 걸까 피아노인가

  病人이 아니라 피아노로 살아온 것에 대해

  동공이 먼저 증거할 때 나는 열일곱 살이 된다  

 

  어둠을 진동시켜 소리가 들리게 되는 거죠 잠이 내려가는

  깊이는 약 10mm이고 잠의 무게는 50g 전후입니다 저음은

  아주 무겁게 고음은 조금만 가볍게 조정되어있어요 뼈는

  장식성을 고려하여 아크릴이나 인공 상아, 베이크라이트 등의

  합성수지일 것입니다 뼈를 잠 속에 빠트려 그 공률로 현을

  치게 됩니다 악몽은 이때 완성되죠 조율되지 못할 만큼

  자랐습니다

 

  흰 가운들이 피아노를 판독하기 위해

  내 몸을 밀폐된 통속에 밀어 넣는다

  뚜뚜뚜뚜 징징징징 디디디디 쿵쿵쿵쿵

  두개골 안에서 낙엽이 흩날린다

  졸면 안 돼 졸면 안 돼…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내 심장을 만진다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내 동공을 만진다

  나도 소녀를 만진다

  내 그림자를 소녀 그림자에 포개 놓는다

  하얀 건반 하얀 가슴 까만 건반 까만 거기

  하얀 어둠 까만 어둠 망막이 젖는 소녀

  빗물 같은 음악이 된다 도시라솔파미래도

  피아노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아득한 저음으로 내려간다

  뚜뚜뚜뚜 징징징징 디디디디 쿵쿵쿵쿵

  내 몸속 피아노는 귀를 틀어막고 있고

  악보는 홀로 펄럭이고

 

 

  

  계단

   ㅡ 어둠과 허공과 흐림과 침묵과 알지 못할 그 모든 것의 亂場

 

  1

  허공 혹은 천 길 나락으로의 주둥이:

  18세기 부하라의 죄수들, 자루에 담겨 46m 칼란미나렛 첨탑에서 뉴턴의 사과처럼 만유인력을 간증했음. 그때 계단은 캄캄했고 귀를 콱 틀어막았을 것임.  

 

  2

  형이상학:

  계단에 주저앉아 울어 본 적 없는 동물과는 절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선 안 된다는 게 아버지 유언임.

  

  3

  형이하학:

  처녀 유부녀 창녀를 가리지 않고 아래쪽 내면의 美를 감상.

  

  4

  黙秘:

  아침 여섯 시, 김칠수 씨 볼일을 보고는 재래식 화장실 0.5m 높이 계단을 헛디디며 최후의 비명을 연주함. 두 시간 후, 妻가 변형된 비창을 작곡할 때까지도 계단은 침묵으로 일관.

  (김칠수 씨 처는 등산길 가파른 돌계단 끝에서 만유인력에 대해 학습했을 개연성이 큼)  

 

  5

  벽:

  김칠수 씨 음악 관련, 그의 처는 계단을 강조하고 近族은 처의 귀와 입에 짙은 혐의를 둠. 자식들 눈동자는 여전히 안개처럼 혼미.

 

  6

  깃발:

  때로는 아무도 몰래 미친 듯 펄럭이기도 함.

 

   7

  유령:

  초고층아파트나 빌딩에 놓인 계단은 고독에 몸서리치며 귀신처럼 괴이한 울음을 흘림. 흐린 날이면 더욱 정도가 심해짐.

  

  8

  친절한 금자씨:

  계단 끝에 걸린

  그림자,

  계단이 바람을 불러들여 순식간에 등을 떠밀어 버리기도 함.

  

  9

  신앙:

  누군가는 제 몸을 계단에 접는 것도 부족해 무슬림처럼 바닥에 이마를 붙인 후 종일 기도를 함. 동전소리가 들릴 때 간혹 이마를 떼기도 함. 그는 계단을 통해 우주를 읽고 밥을 얻고 밤이면 계단을 덮고 잠을 청함.

  

  10

  몸의 내부:

  내 몸 속에도 계단이 존재. 무수한 발자국이 찍혀 있음. 술 취한 아버지 발이 심장 근처까지 올라와 비틀거리거나 여자가 허리 아래로 내려가다 실족키도 함. 계단을 사랑하는 새들이 새벽까지 내 몸을 흔들기도 함. 그래도 나는 위만 보고 상승 중. 몸은 생장을 멈췄지만 계단은 자라기 때문일 것임. 나는 계단에 중독되어 나무계단처럼 자주 삐걱거림.

 

 

나는 사진입니다

 

 나는 사진입니다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립니다 그러나

  내가 속한 계절은 절대불변 늦은 가을입니다

  몇 잎 단풍과 낙엽을 배경으로 나는

  참 아름답습니다

  중세의 가을 같은 배경은 천지개벽이 있더라도

  내 공간에 파란 잎을 틔우지도

  초롱꽃 한 송이 피어나게도 못할 것입니다

  밖의 세상은 아프도록 순백이지만

  나하고는 무관한 일입니다 나는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진입니다 나는

  여하한 경우에도 늙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낡아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싱그럽게 늙어가고

  너무도 싱싱하게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렇지만 빛이 바래서도 나는

  밝게 웃습니다 비바람이 치든 태양이 지글거리든

  변함없이 환하게 웃어야 합니다

  여하튼 그래야 합니다 나는

  사진이기에 모두가 잠든 밤엔 묘비처럼 고독하지만

  눈빛은 부드럽고 온화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않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불면의 밤들을

  눈 안에 차곡차곡 접어놓은 나는

  추억의 배설물입니다 사람들은 잉여의 추억을

  납작하게 인화하여 사각 틀에 가두곤 합니다

  밖에는 눈발이 멈출 기미가 없지만

  나의 감정은 오직 하나입니다 지상의

  저녁과 엉킨 눈이 뿌옇게 흩날리는 것

  어쩐지 쓸쓸하지 않은가요 하지만

  내 표정은 한결같이 고정돼야 합니다 나는 사진이기에

  어젯밤엔 말기 환자가 벽을 향해 나를 힘껏 던졌습니다

  유리 파편에 얼굴이 찍히고 꾸겨졌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아니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무섭도록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사진이기에

 

 

 

俗畵의 발

 ㅡ 화랑에는 그림 속에서 태어난 바람도 전시되어 있고

 

  

 나는 굿판에서 태어났죠 

  神氣 없는 날들이 계속돼요

  문을 열면 수상한 바람이 작두 날을 세우는데

  아버지는 엉망으로 취해있고

  댓가지가 사납게 흔들리며 불온을 편집해요

  그런데 참, 아버지는 무덤 속에 있잖아요

  한 입으로 두말하듯 주술이 흐르는

  내 입술도 구 할이 덧칠된 것이죠

  무병 든 여자가 젊은 날의 내 맨발을 보내왔어요

  발은 주술에 취해 허공에서 허우적거려요

  수많은 발이 보이므로

  부끄러운 내 발목을 돌에 매달아 던져버려야 해요 

 

  카슈카르나 쿠차의 칼날 같은 길 위에서

  허공에 휘파람을 띄우면 안 돼요

  작두 날을 탄다는 건 허공에서 죽은 영혼과 교류한다는 것

  신기 없는 휘파람은 작두 날에 베이므로

  발목도 예외가 아니죠

  그날 무녀는 삭풍 부는 구릉을 오르내리고 있었어요

  내 예감은 작두 날 위에서 동강나고

  그즈음 무녀의 입술이 움직였어요

  육질이 무른 예감은 쉽게 베인다고 

 

  한 무리의 눈보라가 길을 만들면

  한 무리의 발들이 흘러가요

  그것은 대체로 은밀한 풍경이죠

  내 발목은 나를 기억하지 못해요

  「발목을 돌려주세요」

  「너는 바람에 죄를 지었다」

  무덤까지 흘러간 휘파람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흔들리고

  무거운 하늘에 흑색여민귀새가 맴을 돌아요

  작두 날 위 시간은 제 운명을 모른 채

  훌륭히 늙어가고 있어요

  진실은 불편하고 진실의 근저를 이룬 발들은

  미라처럼 무표정해요

  

 

  시안

 

 

  1 시안으로 떠난 당신

 

  당신이 떠났다 김현과 김수영에 관한 텍스트를

  나에게 건네주고

  떠났다 시안으로

 

  당신이 그렇게 떠나간 후

  나에겐 시안과 시안 아닌 것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 思惟는 시안에 관해서만 머문다

  시안,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사진으로도 본 적 없는

  생경하고 아득한 곳

  서역의 문이 열린다는 환유적인 지대

  너무도 아름다워 고통스러운

  시안,

  나는 애초부터 스승이 없었기에 어떤 영향도 받은 적 없는

  그래서 동의한 바 없는 김현과 김수영

  그들은 그곳을 체험했을까?

  당신은 혁명을 위해 시안으로 떠난다 했고

  나는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시안 밖에서

  시안만을 고민하기로 마음을 굳히는데

 

  TV 안쪽 매혹적인 기상캐스터가 내일은 안개가 자욱할 거라 예보한다

  시안은 日氣가 예민한 곳 그러므로

  시안엔 이미 안개가 흐를지도 모를 일

  천 년의 애증처럼 흔들리던

  당신의 눈,

  그 속으로도 안개는 스며들고 있겠지

  산산이 부서지고 싶다던 당신의 문장은 잘 자라고 있을까?

  아,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시안에 집중하지 못하고 횡설수설인 지…

  얽히고설킨 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시안에 몰두해야 한다

 

  TV를 꺼버리고 나는 다시 시안에 집중하기로 한다

  텍스트를 출산한 이들과 혁명을 꿈꾼 이들이 머물렀을

  시안,

  이백, 두보, 쇼저, 모옌, 문학을 사랑한 덩샤오핑까지

  어쩌면 톨스토이와 그가 출산한 안나 카레니나도 시안을 동경했을지도

  위대한 시안,

  그곳에 있는 당신 또한 허리가 풍만한

  출산자다 당신 눈 깊은 곳에서는 통증이 나른하고

  아직 태어나지 못한 텍스트가 자궁 안에 가득하다

 

  발견된, 발견되지 못한

  판각된, 판각되지 않은

  당신의 텍스트가 비틀린 채 떠다닌다

  … 비틀림은 위대한 예술, 혁명,

  그러나

  비틀린 채 매달린 내 심장은 위태하다

  당신을 경험한 게

  이번 생에서의 가장 큰 事故였다 위험한 텍스트가 흩어져 날렸고

  나는 그 안을 헤매다녔다

  튀어 오르거나 바람처럼 날리던 裏面

  살쾡이 눈 같은 저녁도 번득였고

 

  시안과 詩안,

  문장을 혼숙시킨 포주,

  (…)

  텍스트를 출산하는 이들,

  텍스트를 中絶하는 이들,

  텍스트를 안락사시키는 매정한 손들,

  시안의 당신도 계속 출산과 中絶을 반복하고

 

 

  2 불안

 

  시안은 온통 不倫인데 왜 시안 밖 나를 집행하려는 입들이 우글대는 걸까? 팔다리는 고혈압을 앓고 머리는 빈혈을 앓기에 내 문장은 자주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시안 밖에만 거주한다 나는 시안을 등진 채 죽음을 맞을 것만 같다

 

  시안으로 떠나기 전

  당신은 늘

  당신의 무릎 쪽에 나를 귀가시켰다

 

  그리곤 나를 무릎에 누이곤 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무릎은 위태했고 당신 아버지를 복제한 자에 의해 포위되곤 했다 오늘 밤도 무릎 아래에서 태어난 당신 새끼들은 죽은 체하고 있을지 모른다 시안에서조차 당신은 무릎을 껴안고 울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무릎은 시안에서도 시안 밖에서도

  감금 상태,

  예외 없이 저녁은 무릎의 멍처럼 검다

  구해줄까?

  미안하지만 시안 밖의 나부터 구해 줘,

  제발,

 

  밤이면 회색 꿈을 꾼다 시간 변경 선을 넘어온 표절된 은유와 상징이 우글거린다 그게 그것 같은 입술과 언어들

  투르크, 위구르, 허베이, 네이멍,

  매혹적인 텍스트를 꿈꾸는

  혀의 욕망,

  욕망 또한 그 무엇의 模作이겠지

  당신은 非行을 넘어 강렬한 혁명을 모색하지만 이번 생의 내 걸음은 대낮에도 충분히 위험하다

 

  시안에 가지 못한 내가 나의 감정을 사찰한다

  예고 없이 정지될 것 같은

  심장,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불이 꺼져버린

  무대,

  후생에선 극이 완성될 수 있을까? 아니면

  시안에선 극이 완성될 수 있을까?

  시안과 시안 밖의 구간에서 고통은 잠복하고

  함께 몸을 섞던 문장들은 불안스레 펄럭이고

  사형수의 마지막 구간처럼

  입이 마른다

  腦 內의 불안들이 시안을 시안 밖으로 우-우- 밀어내려 한다

 

  그렇지만 나는 시안에 집중하기로

  결연하게 마음을 먹는다

  시안에는

  텍스트를 단두대에 눕히고 담배를 피우는 입술이 보인다

  늙은 문장과 時體 곁에서 병나발을 부는 입술도 보인다

  편지 속 ‘안녕’은 얼마 동안 울먹였을까?

  집행자의 혀에 욕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전과가 많을 것만 같은 입술이다

 

  나는 가능한 지점과 불가능한 지점에 관해 정신이 혼미하다

  본래가 아닌

  본래의 아득한 근원을 思惟할수록

  금역이 되어버린 구조들이 목을 짓누른다 허용과 불용의 틈에서 오물 같은 규범이 흘러내린다 그러니

  시안에 있는 것들이여, 시안에 없는 것들이여,

  내 목을,

  제발 좀 놓아줘!

 

  詩. 안.

  밖.

  원고에 갇힌 텍스트가 집행을 앞두고 마비된다

  귀는 함정처럼 어둡고 탁한 물감이 흘러내린다

 

  이성, 감성, 비이, 논리, 논거, 합리, 윤리, 정석……非文과 비문 아닌 것에 대해 더는 명상이 어려울 것 같다 어떤 경우는 감정을 매장한 사내의 비굴한 미소가 더 詩的일 수 있다 이번 생은 가장 비겁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치는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을지

 

  풍경이 흐리게 보인다 시안을 넘어온 스펙트럼 속의 혼미한 색깔들

  먹먹한 煙氣

  시안의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누군가의 눈동자

  힘겹게 헤엄쳐 들어가면

 

  술에 취한, 비틀대는, 울먹이는, 고함치는, 우울증을 앓는, 동공이 풀린, 정신을 놓아버린, 자살하는, 살해되는, 질질 끌려가는, 센텐스와 센텐스, 텍스트와 텍스트… (빼곡하다)

 

  시안의 경계에선 忌日이 생일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가 그랬다

  눈雪보다 먼저 하얀 말言들이 흩날렸고

  무섭도록 창백한 텍스트가 펄럭이던

  유언의 밤,

  우측에선 어머니가 앓았고 좌측에선 내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버지는 계속 태어났고

 

  함께 놀아준 나무와 가축이 생을 마감한다

  죽은 다음에도 나무는 자라고 가축은 울고

  유언의 채도만큼 번지는 詩들의 허연 빛깔

 

  시안에 거주하는

  당신이 점점 생생하므로 나의 視力은 기운다

  언제부턴가 나의 동공엔 결빙된 새가 머문다

  사용해본 적 없는 異國의 문장 같은

  새의 날개,

  어쩌면 금이 갈 수도 있다 쨍그랑 깨어질지도

  그러니 제발 당신 얼굴은 잉태되지 않았으면

 

 

  3 안개

 

  시안에 가보진 못했지만 나는 시안의 안개를 조우하기도 했다 그것은 백 년 전 시안의 빛깔일 수도 백 년 동안의 슬픔일 수도 있을 거다

 

  길을 잃고 소녀의 자막에 당도했다

  하얀 소녀,

  젖은 동공,

  그곳은 고요로 들어서는 문이었다 안구에선 소리 없는 의구들이 흘러나와 번졌다 엎질러진 어떤 날의 풍경처럼

 

  그날은 세상에서 가장 긴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소녀는 가장 짧은 은유라고 알려줬다 그 사이 몇 송이 풀꽃들이 생을 마감했고 새로운 시인들이 태어났다 다리가 끝날 무렵 소녀는 외투를 여며주고 지워졌다 소녀의 호흡만 떠다니던 다리 위, 뭔가가 응결되었는데

(…)

  지나간 것들은 귀를 앓고 다가오는 것들은 침묵을 앓고

 

  바람이 스스로 태어나고 지워지던 날도 어느 다리 근처였다 다리가 흰 알갱이를 모으고 있었다 그 속에서 미래의 당신은 고요했고 과거의 나는 불안했다 당신의 눈동자 속으로 맺혀지는 불빛과 지워지는 불빛이 스몄다 우리는 무슨 관계를 나눴던가?

 

  새들이 추락했다

  새들의 눈으로 바라본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

  습기로 축축했고

  새들의 날개가 멈춰버린 곳에서

  당신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밀려오고 포개지던

  흰 빛깔들,

  옆에서 자라던 나무가 느릿느릿 사라졌다

  옆에서 자라던 사내가 느릿느릿 등장했다

 

  시안과 연결된 강이었을지 모른다 소녀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다 그곳은 불안한 時體만 술렁일 뿐, 물소리는 방언처럼 난해했고 물보라 속 눈알들이 하얗게 부서지며 죽어갔다 하지만 屍體 곁에선 누구도 죽지 않았다 죽어도 죽음의 혈액만 흘렸을 뿐, 인형의 눈동자가 죽지 않고 낡아지는 것처럼

 

  안개주의보가 자꾸만 재생되고 있다 생각이 시안에서 도망치려 한다

  시안,

  풍경이 그림보다 아름다운

  시안,

  유령 같은 물안개가 술렁이고

  시안의 당신은 고혹적이고 지적이고 생소하고

  시안의 당신은 추하고 역겹고 진부하고

  시안 밖의 나는 몸부림치고

  詩의 안,

  詩의 밖,

  모두 혼란스럽고

 

 

  4 언어, 불결한

 

  시안을 계속 고민해야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린다

미숙아만 낳아대는

  망할 것의 휴대폰,

 

  시안에 집중하기 위해 휴대폰을 안락사시키기로 결심한다

  시꺼먼 액정이 나를 노려본다

  스마트하면서 은밀한 아지트,

  네모난 자궁,

  그 속에 잉태되는 불결하고 더러운 스토리들

  진흙처럼 뭉개버리고 싶어 붉은 혈을 꾸욱 누른다

  심장으로 몰려드는

  당신의 번호,

  손톱 끝으로 찢어버린다 시안에 집중해야 할 텐데,

  시안을 놓치지 말아야 될 텐데,

  전전긍긍하는데

  언어가 모여드는, 언어가 흡수되는,

  휴대폰 내부에는 제가 射精한 언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의구가 굴러다닌다

  외계 같은 문자들, 의심 많은 눈깔들,

  다시 휴대폰을 켜면 시도 욕도 아닌 것들이

  사생아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와

  시끄럽게 울어대겠지만

  나는 어디에서 왜 왔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로 다짐한다

  단단한 적막을 위하여,

  싱싱한 고독을 위하여,

  무엇보다 시안을 위하여, 시안에 머물 당신을 위하여,

  내일은 휴대폰 없이 맨몸으로 외출을 해야지

  모레는 번호를 바꿔야지

  아무도 모르게 본적까지 파내야지

  

 

  5 편지& 울음

 

  시안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그 속에 머물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부치진 못하고 가슴에만 저장할 편지,

  (…)

  당신이 시안으로 떠난 뒤 취한 텍스트가 나를 독해하는 것으로 첫 줄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취한 텍스트가 나를 독해할 무렵부터 시차를 잃어버렸다 시차의 빛깔로 호흡해야 하는데 새벽 세 시에 일어나기도 새벽 네 시에 잠들기도 했다 時와 時가 변경되는 그 애매한 사이 혹은 시와 무의식이 교차하는 틈으로의 여행을 모색하였지만 나는 언제나 주어를 매단 문장만 쏟아냈다 누군가가 나를 ‘시인 나부랭이’로 論한다면 그것은 自業이다

  이곳은 여전히 시안 밖, 카뮈는 마흔일곱 개의 태양을 읽었지만 비의 명상도 듣지 못해 나는 문장을 얼리고 있다 문장을 얼린다는 것, 얼마나 진부한 진술인가? 참으로 한심한 것은 내가 낳은 문장을 단두대에 세운 것이다 그러고도 숟가락을 숭배했던 거에 대해 자백한다 집행에 대해 思惟해야 함은 출산자의 몫이겠지만 비겁한 나는 그림자조차 형장에 닿은 바 없다 여하튼 나는 有罪다

  내 안에 있으면서 내 형상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구간에 갇혀 있다 그럴수록 허물한 혀에 순종한다 나는 이미 개별 존재일 수 없고 고유하지 않은 벌레임을 고해한다 나는 울먹이는 것조차 제어 가능한 뻔뻔한 심장을 가졌다 그러니 입이 나를 쏟아버렸으면 좋겠다 관념화되어 버린 텍스트가 사방에서 단식 중이다 나는 염원한다 전기에 감전되듯 혀가 뻣뻣하게 굳어지길…그런데

  실은 감전이 두렵다 아니 고혈압이 두렵다 그러나 고혈압이 형성한 기류는 거룩한 음률이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같은 음만 반복하다 죽어갔다 그때 나는 관중으로 살았다 천형을 앓을 게 틀림없다 물이 고이는 안구를 심장이 제어한다

 

  이렇게 중언부언 편지를 맺고 나니 시안은 점점 흐릿해진다

  시안에는

  시보다 시인이 많을까?

  시인보다 시가 많을까?

  시안을 집착할수록 이상하게도 시안은 더욱 멀어지고

  또다시 나도 모르게 안구에 물이 고이고

  심장이 못마땅한지 불규칙한 소리를 토해낸다… (쿵쾅쿵쾅)

 

  울어 봐도 시안에 닿을 수 없다

  뭣에도 소용없는

  울음,

 

  울어 봐도 소용없어 그저 흐흐후훗 웃는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검은 빗줄기를 부른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인형에게 화를 돋운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문장의 암수를 바꾼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벽에게 등을 빌려준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화분을 안락사 시킨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발톱에 관해 명상한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죽은 화분과 술마신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양을 차곡차곡 포갠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휘파람을 띄워 보낸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예수를 거꾸로 매단다

  울어 봐도 소용없어 당신이 울길 기도한다

  밤이 새도록

 

  소용없어도 울어보는

  밤은

  내가 나인지도 모를 내팽개쳐진

  非.

  文.

 

 

  6 침묵 

 

  이번 생에서의 울음은 시안으로 떠나지 못하는 몸의 지진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사실을 당신이 눈치챌까 두렵다, 라고 기록하기로 하고 노트를 펼치는데

  그 속에

  당신이 시안으로 떠나기 전 건네준 메모가 접혀 있다

  “사랑의 가치는 그 문장 그 길이만큼?”

  못마땅하지만 나는 엿 같은 언어의 껍데기를 빌려 입는다 달력 속의 여자는 터져버릴 듯 웃고 있고

 

  ㅇ 눈빛이 풀린 병실 형광등이 마음대로 나를 진단한다 밤이면 내가 낳은 텍스트가 병실을 비집고 들어온다 부패한 소리가 그득하다 링거의 수심을 짚어보며 적막과 동거하기로 다짐한다 폭염에 노출된 가축처럼 지나간 문장이 전부 폐사되길 염원하면서

 

  ㅇ 죽어가는 잎사귀를 묶어 텍스트를 쓸어버린다 분리수거조차 불가하다 어제 죽지 않았으므로 어제의 텍스트를 쓸어야 하고 내일 죽을 수는 없으므로 침묵하기로 각오한다 어느 해변에선 언어들이 하얗게 밀려오며 울지만

 

  ㅇ “사랑의 가치는 그 문장 그 길이만큼?” 메모를 짚어가는 내 눈은 몰락한다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태양은 지지 않으므로 疑懼가 파랗게 자라겠지 그러나 지금 메모 밖에선 별들이 차갑게 흐르고 모든 나무는 소리 없이 어둡다

 

  ㅇ 疑懼가 생성한 이상기류로 내 몸은 열대를 앓고 심장은 곪은 사과 빛이다 침묵은 수천 개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어 침묵마저 봉인하고 싶은 밤은 계속될 거고

 

  아, 시안에 대해서만 고민해도

  이번 생은 마감될 텐데

  (…)

  노트를 덮고 계속 시안에 대해 고민키로 한다

  시안에도 禁요일이 있을까?

  우리 내막은 目요일이었지만

  사건은 禁요일에 완성되었다

  禁요일에 태어난 아기들은 제발 언어를 배우지 않기를, 그래서 어  떤 문장도 짓지 않기를,

 

  그 禁요일,

  더러운 관찰자가 무덤을 기획했고 저녁은 정밀하게 도착했다

  마지막을 각오한 날도 禁요일이었다

  삼류시인도 진부한 詩도

  모두 禁요일에 우글우글 태어났다

  禁요일은 빛처럼 빨리 순환했고

 

  禁요일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므로 당신은 시안으로 떠났는가? 시안에는 또 다른 禁요일은 과연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시안에선 왜 타인의 형틀에 스스로 매달리기도 강제로 추락하기도 하는가?

 

 

  7 묵음을 읊는

 

  나는 시안만을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쯤은 당신이 시안 밖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시안을 의식하는 뇌와 시안에 닿은 적 없는 손가락은 별개이므로 내 손가락이 묵음을 진술한다

 

  ⅰ) 사실 나의 유전자는 식물성이다 그 사실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나는 이미 有機體가 아니고 그저 시험 삼아 만들어진 試案이므로 이제 더는 시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꾼다 병실 벤자민 이파리들 누렇게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가

 

  ⅱ) 자궁 이전을 떠올린다 그곳에 속했을 땐 별들이 무덤 숫자만큼 떠올랐고 언어는 없었다 그러므로 내게서 떠난 텍스트는 사실 묵음이든지 異敎의 묵시록일 것이다 그런데 벤자민 푸른빛들은 모두 어디로 흘러간 걸까?

 

  ⅲ) 지난 가을 서울역 지하도 귀퉁이에서 술 취한 여자를 보았다 요한의 여자였다 나의 본향에선 침묵으로 말하므로 그녀의 손바닥에 오천 원짜리 한 장을 조용히 얹었다 그녀의 동공엔 소주 몇 병과 순례자 머리통 수십 개가 떠올랐다 지상에선 브레이크 고장 난 차들이 십자가 좌측에서 우측으로 위태하게 달렸고

 

  ⅳ) 내 귀는 여전히 자폐를 앓고 손바닥은 못 자국이 선명하다 당신이 보내 준 시안의 경전은 휘어진 내 등을 통과하여 십자가 주변에서 펄럭인다 그리고 禁요일마다 내가 낳은 텍스트가 내 목을 감는다 내 발등은 이미 열두 번 심판 받았는데

 

  ⅴ) 성 토마스가 마드라스로 떠나는 것처럼 나는 12+9월을 모색한다 암살된 토마스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을 거고 겨울 속의 나는 사막보다 뜨거울 거고

 

  

  8 나는 일회용 試案

 

  이젠 시안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시안이 역겨워진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시안,

  너무나 혐오스러운

  시안,

  그곳을 지우기로 한다 하지만 그곳의 당신은 선명하다

  혼란스런

  시안 그리고 시안이 아닌 것들

  詩 안과 당신,

  詩 밖과 나,

  그러므로 내 눈은 백야를 앓는다

 

  나는 시안이 아니다 일회용 試案이다. 나는 잠들지 못한다. 잠은 침묵의 또 다른 형식이어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밤 안에서 눈眼이 굳어지길 염원한다. (혀 또한 그렇게 되길) 시안의 나무귀신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성자처럼 입술에 힘을 잔뜩 주며 과묵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다가온다. 손에는 이파리가 무성하다. 그 무성한 손이 내 입을 막고는 지그시 내려본다. (눈도 막아주지 않을래, 눈에서 태어난 텍스트가 더 혼란스러워!) 나의 家系는 소음을 심하게 앓았다. (귀까지 막아주지 않을래?) 시안의 고통이 병실 안에 그득하다. 나무귀신 때문이다. 동공은 여전히 환하고 혀는 언어를 쏟아내려 한다. 마비를 위해 주문을 외는데 벽을 긁는 첫사랑이 보인다. 장애를 앓는 언어들이 묻어나온다. (왜 손톱 아래 사연들은 늘 이런 식으로 자라는 걸까?) 지나간 날들의 詩를 깨버리기로 한다. 시가 깨질 때마다 부패한 언어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눈은 시리게 아프고 中耳에선 새가 비명을 지른다. 비명이 점점 증폭된다. 뇌막이 흔들린다. 창문이 덜컹거린다. 모든 것들이 새의 비명에 흡수되고 이제 세상에는 새의 비명만 남는다. 나무귀신 얼굴이 검붉게 변하면서 휘청거린다. 나무귀신이 쿵 쓰러진다. 아침이다. 아, 나는 어둠의 내면이 입자가 환하다는 걸 느끼며 죽어갈 게 틀림없다.

 

  서랍 위에 포개진 언어들이 알람처럼 울면서

  잠들지 못한 내 눈을 기상시킨다

  문득 시안에 있을 당신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

 

  병실에 갇힌 나를 위해 당신은

  언어를 채집하여 보낸 적 있다

 

  개미의 찬송, 나무의 눈물, 바람의 통증, 눈 없는 조각, 들꽃의 한숨, 유리창에 고인 저녁

  이 모든 게 다 센텐스며 텍스트였다 당신은 그것들의 자궁이었고

 

  내일 밤도 내 눈은 백야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보낸 수집품을 서역 어느 별자리로 띄워 보낼 설계를 한다 흐린 나비로 환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차피 임시로 만들어진 일회용 試案이고 내 무덤은 허공에 흘러야겠기에

 

  이젠 告하고 싶다

  묵음을,

  詩. 안. 밖.

  詩 없는 묵음을, 묵음뿐인 詩를,

 

  가까운 허공에서 하얗게 바랜 별이 흘러간다

  나를 기록하면서

  혹은

  기록하지 않으면서

 

 

 

안민 (본명: 안병호) 시인-경남 김해에서 출생

- 동국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2013년 제2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