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축구 - 장석주

heystar 2011. 2. 10. 01:52

 

 

      축구

 

            장석주

 

어린 시절 공을 차며 내가

중력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알아야 할 도덕과 의무가

정강이뼈와 대퇴골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변동과 불연속을 지배하려는

발의 역사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초록 잔디 위로 둥근 달이 내려온다.

달의 항로를 좇는 추적자들은

고양이처럼 예민한 신경으로 그 우연의 궤적을

좇고, 숨어서 노려본다.

항상 중요한 순간을 쥔 것은

우연의 신(神)이다. 기회들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왔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굼뜬 동작으로 허둥대다가는 헛발질한다. 헛발질: 수태가 없는 상상임신.

내발은 공중으로 뜨고

공은 떼구르르르 굴러간다.

 

마침내 종료 휘슬이 길게 울린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연금술사들은

스물두 개의 그림자를

잔디밭 위에 남긴 채 걸어 나온다.

오,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이것은 살육과 잔혹 행위가 없는 전쟁,

땀방울과 질주, 우연들의 날뜀,

궁극의 평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 출전- 『절벽』(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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