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
전 다 형
재활용 센터에 갔다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고물 전자제품들이
푸석한 얼굴로 나앉아 있었다
치매를 앓는 노인의 기억을 되찾아 주듯
잃어버린 길 한복판에서 주파수를 맞추었다
녹슨 나사를 풀고 심장을 덮은 커버를 벗겨 내었다
두껍게 앉은 슬픔을 걷어내고
희미한 추억을 더듬어 나갔다
세상의 눈과 귀를 끌어당겼던 가슴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촘촘히 박힌 사랑의 회로는 멈추어 서 있고
풍을 맞은 선풍기와 눈을 잃은 사진기가
서로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굳은 살 박힌 손길이 어둠 속에 끊긴 길을
이으며 30촉 알전구 스위치를 올리고 있었다
작업복 무릎에 앉은 납똥을 문지르며
고지서에 등이 휜 이 씨는 지는 해를 잡아당기지만
어둠이 가게의 문을 끌어내렸다
공치고 빈손으로 오르는 산동네 44번지
집 밖까지 마중나온 아기별이 눈물을 끌썽이며
겨울 문밖에서 서성이었다
복개천 난간에 허리를 기댄 자전거가 중심을 잃어
등뼈가 부러진 채 가게 구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청진기를 든 의사처럼 나사를 조이고 풀면서
연신 땀을 훔쳤다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으며
가슴에 품은 꿈도 함께 풀고 조이기를 반복하면서
한순간 나가버리는 퓨즈를 수없이 갈아 끼웠다
전원 스위치를 넣자 화면 가득 망가진 얼굴들이 모여들고
멈추어 섰던 세상의 길들이 달려왔다
- 전다형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 2012)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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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 2012).
- 2012년 부산작가상 수상.
- 현재 한국작가회, 부산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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