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피아니스트
김 요 일
오래 전에 나는 아바나 해변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유명한 악단의 멤버는 아니었지만
가끔, 취한 체게바라가 찾아와 클럽의 연주를 듣고 가기도 했었지
바다가 보이는 작고 낡은 바에선 언제나 음악이 끊이질 않았다네
석양을 칵테일 잔에 담아 마시던 이국 아가씨의 뺨이 발그레 물들 때
잘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가가
이마에 입맞춤해 주기도 했었지 아바나에선
그렇게 사랑을 시작한다네
기분이 나면 맘보나 차차차를
제국의 거리에, 살구꽃 냄새 나는 불온한
유인물을 뿌리고 돌아온 새벽에는
슬픈 살사를 두드렸다네 오래된 건반이 부서지도록
그럴 때면 샛노란 양철 지붕 위로
푸른 달빛이었는지, 굵은 빗줄기였는지
혁명이었는지, 고백이었는지
폭포처럼 방언처럼 쏟아져 내렸었고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깊고 아픈 꿈을 꾸기 시작했었지
아득히 그리운 그곳
아바나에선 모두가 시인이라네
시거든 대마초든 달디단 담배를 물고 아무 곡조나 흥얼거리지
아무도 무언가를 적지 않지만
인생을 조금 아는 사람들의 눈에선
당신 닮은 수련꽃이 몇 번이나 피고 졌다네
예전의 나는 아바나 해변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네
산타루치아 해변이나 이태원의 숨은 뒷골목에서였는지도 모르지만, 차차차.
시집 『애초의 당신』(민음사, 2011) 중에서
1965년 서울 출생.
서울교대 음악교육과 졸업.
1990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붉은 기호등』(문학세계사,1994) 『애초의 당신』(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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