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심도
정채원
표피만 탔을까
더 깊은 속까지 타버린 건 아닐까
불탄 소나무 껍질에서 송진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물관까지 탔다면 포기해야 한다
모든 상처를 눈물로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데
심도의 문제라지만
사랑의 심도
절망의 심도
그 보이지 않는 눈금을 무엇으로 잴 수 있나
산불이 남긴
그을음의 높이와 넓이가 각기 다른 숲속
물관을 따라 기어이 높은 곳으로 오르는 물은 기억의 중력보다
힘이 세다
뿌리만 남았던 아카시아에도 새싹이 자라나고
거북등처럼 타버린 소나무에도 연두 바늘잎이 나오는
새봄이 왔다지만
아직도 계속 송진만
눈물처럼 흘리고 있는 나무들이 곁에 있어
쉽게 새봄이라고 소리치지 못한다
지나간 불길을 지우는 속도는 제각각이다
-출처; 계간 『시와 함께』 2022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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