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 유령
최영랑
어느 작은 행성에 와 있는 느낌이야 우주를 떠돌다 501호 외벽에 잠
시 불시착한 것만 같아 어지러워 허공을 딛고 있는 내 몸이 아직도 아
슬아슬해 목소리를 자꾸 1층으로 떨어뜨리리고 있어 목소리보다 먼저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저기 내 눈동자 좀 봐 비둘기 떼가 쪼아대더니
물고 날아오르고 있어 내버려 둘 거야 어차피 표정은 필요 없으니까 내
가 잠깐 지상을 착각해서 걸어 다니고 있을 뿐이니까 이곳은 늘 흐르는
곳이야 사라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의 무수한 자리바꿈, 잔향들로
항상 북적거리지 난 이곳에서 사계의 햇빛과 바람을 채록해 그건 제라
늄과 산세비에리아 치자꽃향기로 피어나기도 하지 항아리 속 미생물들
을 깨우는 일이기도 해 발목이 없는 몸은 우주로 통하는 길이야 사색 없
는 존재가 무한히 확장되는 길이기도 해 무한대의 길들을 따라가다 보
면 멀어지면서도 가까워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지 그러니까 이곳에서
나도 흐르고 있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야 지독하게 고독과 적막을 감각
하지 않아도 되는 계절 속에 있는 거지 문득 노아의 방주가 생각나는 지
금 나는 우주 바깥으로 멀어지는 상상을 하고 있지 산 자들이 나에 대한
기억을 매 순간 밀어내고 있으니까, 희미해지거나 흩어지는 일은 무모
한 일은 아니야
-출처; 계간 『리토피아』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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