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상자
김경인
상자를 만들어요. 십 년 됐어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상자는 잔디밭에 있어요. 흔들리지 않는 잔디 풀 옆에. 혼자 흔들리는 잔디 풀 옆에. 아니,
흩어지는 구름 아래. 매애애애 하나로 뭉쳐져 똑 같은 모양이 되는 양 떼들 아래. 아니, 올라
가는 층계, 아니, 내려가는 층계, 그곳에 상자는
없어요. 아름다운 잔디밭엔 잔디가 없어요. 안녕, 엄마, 안녕, 동생아, 이제 자러 갈 시간이야,
다 버렸어요. 새 장난감들로 채웠어요. 아니, 아니, 상자 말구요. 상자는
말이 없어요. 당신은 다 알고 있지요? 나는 칠월의 무성한 포도넝쿨, 상자에 묶인 어여쁜 빨강
리본을 그리워해요, 상자엔 빨갛고 기다란 싸구려 노끈, 노끈 아래엔 물고기 시체, 혹시 울어요?
물속같이?
종이가 금방 찢어질 것 같아요. 상자를 만들어요. 십년 후에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오직 당신을
위해 찢길 상자 하나를. 당신도 알지요? 십년 전에.
[출처] 김경인 시집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민음사, 2012.
시집; 『한밤의 퀼트』『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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