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함께
배영옥
르네 마그리트의 마그네틱 사과 한 알 현관문에 붙여놓고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사과의 허락도 없이 문을 따는 사람
나는 이제 더 이상 과수원집 손녀가 아니고
사과도 이미 그때의 사과가 아닌데
국광, 인도, 홍옥……처럼 조금씩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
사과의 고통은 사과가 가장 잘 안다는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럼에도 매번 피어나는 사과꽃처럼
봄이면 내 어지럼증은 하얗게 만발하곤 하지만
나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한 번도 빨갛게 익어본 적 없는 사람
내가 사과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건
사과의 눈부신 자태 때문이 아니라
사과 이전과 사과 이후의 고통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할아버지도 르네 마그리트도 방문하지 않는 현관문 안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
한 알의 사과 門 안에서 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
그럼에도 사과는 이미 사과꽃을 잊은 지 오래
그럼에도 나는 이미 사과를 잊은 지 오래
—월간 《시인동네》2017년 9월호에서
- 시집 『뭇별이 총총』
- 여행 산문집『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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