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타오르는 책 - 남진우

heystar 2018. 9. 10. 20:03

 

      타오르는 책 

                   남진우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게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을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은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내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출처] 남진우 시집 『타오르는 책』2000년 6월 (문학과 지성사 刊)

1960년 전북 전주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 졸업.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수상; 대산문학상 평론/시부문. 팔봉비평문학상, 서라벌 문학상, 동서문학상 등.

저서; 『타오르는 책』『새벽 세시의 사자』『사랑의 어두운 저편』『죽은자를 위한 기도』『폐허에서 꿈꾸다』등.

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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