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달력으로 삼십 년
박상순
캄캄한 어둠이었음. 무서운 동굴이었음. 끔찍한
땅속이었음. 땅밖의, 굴 밖의
하늘에는 번개가 치고 어둠이 박살날 듯
천둥이 치고, 천둥 당나귀가 물었음. 굴속 당나귀가
답했음. 나는 당나귀. 황금 당나귀. 황금빛 심장을
가진 당나귀. 황금 귀를 가진 당나귀.
귀가 아팠음. 벼락 당나귀가 황금 귀를 물었음.
어디서 왔음? 하늘에서 떨어졌음. 구름 속에
있었음. 귀가 아팠음. 사실은 거짓이었음. 캄캄한
어둠이었음. 귀신 당나귀들이 황금 귀를 물었음.
무서운 동굴이었음. 육갑신장 당나귀가 잠든 사이,
처녀귀신 당나귀가 목욕하러 간 사이, 굴속 당나귀는
굴을 파고 달아났음. 딴 세상에 떨어졌음.
머리가 하얀 매서운 눈초리의 당나귀 방에 떨어졌음.
백발의 당나귀가 물었음. 새빨간 당나귀를 아는가?
퍼런 당나귀를 아는가? 당나귀는 당나귀지?
백발의 당나귀가 벽을 쾅쾅 치자마자,
육각 당나귀, 팔각 당나귀, 곰발바닥 당나귀,
너구리 눈두덩이 당나귀, 암평아리 당나귀,
돼지 꼬리 당나귀, 줄줄이 들어왔음. 당나귀들과
인사했음. 굴속 당나귀? 컴컴 당나귀?
당나귀 국수 먹으러 당나귀
식당에 가고, 당나귀 술 마시러 당나귀
거리에 가고, 당나귀 고기 지글지글 굽다보니
가을이 오고, 첫눈도 내리시고, 황금 당나귀는,
굴속 당나귀는 당나귀 거리의, 당나귀 마당에서
수박 당나귀와 혼인을 했음. 당나귀 화폐 30원을
가지고, 당나귀 언덕에 살림 차렸음. 당나귀
골짜기에 눈이 내리고, 당나귀 골짜기에
별이 내리고, 당나귀 기차가 지나가고,
당나귀, 당당나귀, 황혼이 지고
배 아파도 당나귀, 골 아파도 당나귀, 황금 당나귀.
당나귀 달력으로 30년이 지나서, 수박 당나귀 무덤가,
깊고 깊은, 당나귀 골짜기에 굴러 떨어졌음.
육갑신장 당나귀가 밀었음. 처녀귀신 당나귀는
침묵했음. 엉덩이가 두 쪽 난 당나귀, 앞발 뒷발 다
부러진 당나귀, 캄캄한 어둠이었음. 끔찍한
바닥이었음. 골짜기 위에서는……
당나귀 지옥에도 없는 당나귀!
암흑 당나귀. 컴컴 당나귀, 허위, 날조, 위조 당나귀.
귀신도 버리고 간 당나귀. 개떡갈나무 당나귀!
천둥이 치고,
당나귀 달력으로 30면. 골짜기엔 밤새도록 비가 내렸음.
- 출처; 『대산문화』vol 61, 2016년 가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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