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도축사 수첩 - 박형권

heystar 2014. 12. 2. 10:53

도축사 수첩 ​ ​ ​

 

                    박형권 ​ ​ ​ ​ ​ ​

 

 

트럭에 실릴 때 한 번 우시고

도축장에 도착했을 때 한 번 우시고

보정틀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우셨다

그는 모든 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가 보정틀 안에서 모로 누웠을 때

나는 안면의 중앙을 전용 총으로 타격했다

나는 모든 인간과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뻗어버린 그가 예기치 못한 눈물을 주르르 흘렸을 때

나는 그가 그분인 걸 칼에 베인 듯 알았다

무논의 써레질이 있게 하시고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 있게 하시고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의 일을 있게 하신

그분인 걸 알았다

그분이 쏟아놓으신 눈물을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할지 망연하였다

아주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셨다

저 먼 곳 더 크신 우주의 누군가가 대신 흘리는 눈물이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 전생을 반추할 줄 모르는

나의 식욕을 위해

우주 밖의 더 크신 공백이 안타깝게 부어주는 숭늉 한 그릇이었다

애초에 소처럼 반추위를 가지지 못한 나는

위장을 더부룩하게 채우면 그만이고

이웃과 우주와 우주의 심오한 계획을 위해

한 번도 되새김질하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은

흘려도흘려도 담을 줄 모르는 나에게

오래전부터 그분이 보낸 서신이었다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 아니었다

다만 좀처럼 확인하지 않는 내 우편함에 이미 도착해 있었을 뿐이었다

이 행성의 이름으로 뜨겁게 견뎌낸 그분의 여름을

나는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단지 고깃덩이셨지만

우물우물 여물 씹는 소리로 온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셨다

 

                          - 계간 『시산맥』 2014년 가을호 발표

 

1961년 부산에서 출생.

- 경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 2006년 《현대시학》 등단.

- 시집; 『우두커니』(실천문학사, 2009). 

 

[출처]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5년 올해의 좋은 시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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