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시학』2013, 상반기호 <화제 시조집 리뷰>코너에 나의 시집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가 실렸다. 본 시집에 실린 이승하 교수님의 해설을 정리, 요약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도 요즘같이 시집발행이 흔한 세상에서 한 시인에게 10페이지 분량의 리뷰를 실어주었으니... 늦었지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前略 ‥ 박해성 시인이 등장한 것은 2007년이다. 제 30회 한국시조시인협회주최 전국시조백일장에서 <길>로 일반부 장원을 한 뒤 201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부문에 <새, 혹은 목련>이 당선되었다. 올해 제4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에서 <만복열쇠점>으로 대상을 받았다.
척하면 열려라 뚝딱,
천국 문도 연다는
우리 동네 공인 9단 열쇠 장인 김만복 씨
꽉 잠긴 생의 비상구, 정작 열 줄 모르면서
헌 잡지처럼 찢어버린 과거는 묻지 마라,
기꺼이 갇혀 사는 반 평 독방 컨테이너
탈옥은 꿈꾼 적 없다
반가부좌 부처인 듯
호적조차 말소당한 애물단지 스쿠터는
꽃을 받고 훌쩍이던 다 늙은 아내인지
이따금 딸꾹질하는 빗장뼈가 수상한데
온 세상 잠긴 문은 노다지, 노다지라
불러줍서예!
집집마다 전화번호 붙여놓고
萬 가지 福 중에 하나
느긋이 찻물 우린다 ― <만복열쇠점> 전문
그의 시조는 자연에서 문명사회로 시선이 이동하였음을 말해준다. ‘길’이라는 보편적이면서 추상적인 시적 공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봄날의 새 혹은 목련을 보고 풍경화를 그리던 시인이 자기 동네 ‘공인 9단 열쇠 장인’ 김만복 씨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그는 반 평 독방 컨테이너에 ‘기꺼이’ 갇혀 산다. 하지만 탈출을 꿈꾼 적 없고 애물단지 스쿠터를 타고 다닌다. “꽃을 받고 훌쩍이던 다 늙은 아내”의 등장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따금 딸꾹질하는 빗장뼈가 수상한데”를 보니 아내가 곧 스쿠터다. “헌 잡지처럼 찢어버린 과거는 묻지 마라”를 두 번째 연으로 독립시킨 것도 새로웠지만 집집마다 열쇠 수리를 부탁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장면―, 마지막 연이 압권이다. ‥‥ 후략 ‥‥
진보나 보수보다 깡통을 신뢰한 나는
난바다를 유영하던 등 푸른 어류였지
바코드 작살에 꽂혀 이냥 속내 들키고는
불쑥 꽃을 내밀던 그 녀석, 등 돌렸어
뚜껑을 따는 순간 내 가난이 쏟아지자
단번에 영양가 없다, 걷어차며 투덜투덜
찌그러진 옆구리가 무시로 욱신거려
잔별 다 이울도록 울었던가, 웃었던가?
바람의 이빨 자국에 내면부터 녹이 슬던
한 토막 환상통이 욱신대는 늦저녁에
비릿한 애증처럼 들끓는 김치찌개
쓰린 속 풀어지려나, 눈물 콧물 얼큰하다 ―<참치통조림> 전문
김치찌개에 참치를 넣어 끓여 먹는 가난한 서민의 저녁 식탁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깡통’은 통조림 깡통이기도 하고 ‘깡통계좌’, ‘깡통아파트’, ‘깡통부동산’ 같은, 서민을 울리는 것들의 대유법으로 쓰인 시어이기도 하다. “진보나 보수보다 깡통을 신뢰한 나”의 ‘깡통’은 빚이나 일확천금에의 꿈을 상징하는 낱말이기도 하다. ‥‥ 중략 ‥‥ 김치와 참치통조림만 있으면 끓일 수 있는 참치김치찌개를 먹으며 숙취로 쓰린 속을 달래는 깡통계좌의 주인공이 이 시의 화자다. 이런 시조는 시사적인 내용과 실험적인 형식이 잘 어우러져 아주 재미있게 읽힌다.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는 제목과는 달리 형식도 내용도 아주 거시적이다.
내 윗대 할아버지는 몽골의 전사라 했지, 본디 고운 할머니는 여진족 규수였는데
청동기 거울을 깨고 게르촌으로 도망쳤단다
개기월식 개인 후에 귀 큰 아이 태어났지, 금모래빛 살결에 엉덩이 푸른 반점
절반은 바람이 키운 대륙의 아들이시다
늑대보다 더 빠르게 말 달리던 열여덟 살, 눈보라를 방목하던 중원을 가로질러
동녘 성 공주님에게 별을 따다 바쳤더란다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앞 2개 연
몽고반점을 지닌 화자의 조상은 “늑대보다 더 빠르게 말 달리던” 대륙의 기마민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3연에 가면 “북극성이 점지하신 만주 도령”은 “도도한 김해김씨 문중 큰 아기씨”의 손을 잡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 ‘우리를 단일민족이라고 볼 수 없지’라는 말을 시인은 하고 싶었던 것일까. ‥‥ 중략 ‥‥
이 시집에는 우리 고전을 바탕으로 삼아 그것의 현대적 해석에 집중한 시조가 몇 편 보인다. 예컨대 <바리데기, 그 후>, <헌화, 헌화가>, <정읍사, 안단테로>, <대왕암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로별곡>등이 있다. 온고이지신의 정신에 입각하여 쓴 이들 시조 가운데 두 작품만 보자.
한때는 판잣집에 우리 누이 산 적 있지
아흔아홉 번 망설이다 여우로 변신하신
기지촌 바리공주님, 제석천의 분꽃 같은
(중략)
고추 당초 곶감보다 주홍글씨 더 무서워
곱슬머리 늑대 따라 울며 바다 건넜다는
이녁의 헌신짝이여, 단물 빠진 츄잉껌이여! ― <바리데기, 그 후> 부분
‘바리데기’는 원래 죽은 이를 위한 굿인 오구굿에서 부르는 서사무가이다. 바리공주는 오구대왕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버림을 받아서 ‘버린 공주’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리자 서천국까지 가 약수를 구해 와서 아버지를 살리는 바리공주의 영웅담을 기본으로 하는데, 그래서 바리공주는 옛날부터 무조신巫祖神으로 숭상되어 왔다. 이러한 서사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 작품은 전개된다.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의 마지막에서 잠깐 비친 국제결혼이 여기서 재론된다. 기지촌의 미군접대부가 현대의 바리공주인가, “불나비같이 불꽃 속에 던진 몸”이다. “휘영청, 계수나무에 목매달고 싶었다”지만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을. “곱슬머리 늑대 따라 울며 바다 건넜”건만 결국에는 버림받은 이 땅의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 ‘역사’ 혹은 ‘역사의식’은 다른 작품에서도 펼쳐진다. <세종로별곡>에서도 '청산별곡'의 후렴구 인용을 통해 온고이지신의 정신을 실현하는 동시에 시인은 그 지점에 멈추지 않고 세태풍자를 통한 비판의식을 행하고 있다.
박해성 시인의 실험정신은 집요하기도 하고 적극적이기도 하다. 시조의 음수와 음보를 지키면서도, 즉 파격으로 가지 않으면서도 편편마다 작품의 실험정신이 차고 넘친다. 자연에 감정을 이입해서 쓰는 ‘음풍농월’이나 ‘안빈낙도사상’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한국의 시조가 장구한 세월 전원시 내지는 목가시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는 듯이 박해성은 정형시의 규약을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자유를 구가하는 시인이다. 모험가이자 탐험가이다. 발명가이자 특허출원자이다. 부박한 말이 넘쳐나는 인터넷 시대에 언어의 실험실을 밤새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 중략 ‥‥
그 별에서는 누구나 손가락으로 생각한다,
자고나면 삘기처럼 돋아난 시인들이
단 하루 쉬지도 않고 설사하듯 시를 싸댄다
심장은 없어도 좋다
영혼도 필요 없다
2진법의 두뇌와 전류가 흐르는 핏줄
단추만 누르면 살아나는 저 양양한 세포들 ― <인터넷 그리고 시인> 전반부
인터넷이 우리네 생활 한복판으로 들어온 이후 시는 오랜 사색의 결과물이 아닌 일회용 컵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너나없이 쓰고 있고, 여기저기에 버린다. 표절에 패러디에 복제에 퍼가기에……. 말이 남발되고 시가 길어지면서 자연히 운율을 잃어 이제 시는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 되었다. 횡설수설 술김에 늘어놓는 말 같은 것이 시의 탈을 쓰고 횡행하는 이 시대에 시조를 쓴다는 것은 언어의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 ‥‥ 중략 ‥‥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고 한 이는 김수영이었고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라고 한 이는 김지하였다. "철없이 설치는 풍자"를 "송송 썰어 양념하"겠다는 이는 박해성이다. ‥‥ 후략 ‥‥
그대,
늘 무표정한
백의白衣의 테러리스트
밀림 속 빗소리가 동공 깊이 배어 있다
톱날에 이냥 버히던 비명이 덜 마른 걸까?
태양의 암호거나 바람의 진술 받아 적은
안태본 나이테며 새소리 다 풀어낸 몸
하 숱한 담금질 끝에 전생마저 토설하고
이승 반, 저승 반쯤 맨발로 넘나들던
순교자의 핏빛이다, 식물성 득음의 길
캄캄한 씨앗 하나가 공즉시색空卽是色, 하늘 여니
함부로 찢지 마라
대자대비 부처시다,
수라 같은 세속의 말 담담히 그러안는
그 가슴 어디쯤인가 사리 몇 과 영글겠다 ―<A4용지에 관한 단상> 전문
A4용지가 “늘 무표정한/백의의 테러리스트”라고 하였다. 밀림 속 빗소리가 테러리스트의 동공 깊이 배어 있다는 표현이 신선하다. A4지에 적힌 시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바로 제2연에 나와 있다. 이만큼 절치부심하며 써야 하고 사생결단하고 써야 한다. 목숨 걸고 A4지에 쓴 것이라면 우리는 찢지 말아야 한다. 결국 한 편의 작품에는 “순교자의 핏빛”이 배어 있고 ‘득음’과 ‘공즉시색’을 거치면 “대자대비 부처”와 같이 된다. “수라 같은 세속의 말 담담히 그러안는/그 가슴 어디쯤인가 사리 몇 과 영글” 날이 올 것을 희망하며 박해성 시인은 오늘도 내일도 시조를 쓸 것이다. 늦깎이 시인의 앞날을 큰 기대감을 갖고 지켜보고 싶다.
[이승하 글]
[출처] 『정형시학』2013, 상반기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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