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 리뷰

물의 기억, 가볍거나 무거운 - 염창권

heystar 2014. 1. 15. 12:30

 

        

 

  *

바닥 모를 심해에서 당신이 떠올랐다

나는 또 그날처럼 잔기침을 누르는데

'외롭다' 물 위에 쓴 글 목젖에 걸린 고래처럼

 

  *

무작정 멀리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지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었거든

아파요? 김 서린 창에 흘려 쓰던 낯선 남자,

 

대답 대신 눈물짓는 유리창만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잠들었지

넓은 어깨에 스르르

환절기 잔설이 녹는 전생의 국경을 넘고

 

쇳소리 된기침에 선뜻 내민 흰 손수건, 속이 텅 비었나봐요

난 실없이 웃었지만

아파요? 많이 아파요? 가늘게 떨리던 손말手話

 

  *

언제부터 그랬을까, 역마살 도지는 날엔

다음 생에 다시 만나 못다한 말 하겠다던

제 울음 잃어버린 새, 허공을 자꾸 맴돈다

 

            - 박해성 <통증클리닉> 박해성시집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리토피아, 2012)중에서

 

    이 시조는 모두 세 부분으로 분절되어 있다. 각 부분은 자체적으로 의미가 완결되었다가 다시 전체적으로 통합된다. "①외로움 -> ②낯선 남자의 손말 ③다음 생의 약속"과 같은 의미의 궤적을 보이는데, 주체의 외로움이 타자의 존재적 외로움과 충돌하면서 지상의 존재로서의 숙명적 얼크러짐을 야기한다. 문제는 나의 외로움보다도 "손말(手話 )"을 하는 "낯선 남자"의 외로움을 각인하게 되면서 외로움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실존적 고독이 보편적 감수성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우선 "바닥 모를 심해"는 무의식의 연원을 떠올리기에 족하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근원이 "당신"일까. 당신은 나보다도 실존적 고독에 침잠되어 있는 상태로 오히려 내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당신은 "아파요? 김 서린 창에 흘려 쓰던" 단독자일뿐이다. 단지 그는 "아파요?"하는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도 이 질문 하나로 "대답 대신 눈물 짓는 유리창만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잠들었지/ 넓은 어깨에 스르르/ 환절기 잔설이 녹는 전생의 국경을 넘고"와 같은 치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어서 "속이 텅 비었나봐요"에서 자가진단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실존적 공복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체의 실존적 공복감은 공감을 통해 연대할 대상의 부재를 암시한다. "역마살 도지는 날"이 찾아오는데, 이 실존적 고독 혹은 궁핍은 소통되지 않는 감정의 질곡 때문이다.

 

   그래서 "손말"을 하였던 당신이 심해에서 떠오르고 "제 울음 잃어버린 새"를 연민과 공감으로 허공 중에서 불러보는 것이다. 그게 일상이 아닌 환몽일지라도 "당신"을 기억하는 것만으르도 질퍽한 감정이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통증은 실존적 공허에서 유발되므로 공감의 힘만이 클리닉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 "당신"의 손말은 "제 울음 잃어버린 새"의 몸짓에 불과하지만 그 몸이 만드는 말이 화자의 외로움을 텅텅 울리게 하면서 치유의 단서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들 어깨를 빌려주고 싶지 않을까. 타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위안을 주는 바 크다. 이때 화자는 잠시 꿈을 꾸는데 그 사이에 "전생의 국경을 넘"고 "다음 생"마저 기약을 한다. 찰나 속에 우주적인 시간이 풍족하게 넘치는 것이다.

 

    박해성 시조의 특성은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바이지만 막힘없이 풀리는 걸쭉한 이야기의 힘에 있다. 이는 삶의 역정을 바라보는 눈이 녹록하지 않은 내공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즉 막힘없이 쏟아내는 그 말의 힘은 그의 장점이지만, 자칫 가볍게 풀어버리는데서 오는 율격적 이완에 주의해야 할 터이다.                                                

                                                                                                                        [월평] 염창권

- 출처; 시전문월간지『유심』2013,4월호에서 발췌.

 

염창권시인은

-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 시집은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햇살의 길』『일상들』등과

- 평론집『집없는 시대의 길가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