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수 헷갈린 바람 돌아서는 길모퉁이
만성두통 앓고 있는 신호등 하나 서 있다
오늘은 신열이 심한지 눈자위 종일 붉은
그 속내 아리송해 건널목을 서성인다
고삐 풀린 욕망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
나 혼자 멈춰 섰는가, 눈치껏 둘러보니
길가의 늙은 벤치 생각 깊어 침묵인데
가지 잘린 가로수 제 잎을 다 떨군다
때로는 몸피 덜어야 한 고비 넘는다고
상투어가 밀고 당기는 외마디 유행가에
골다공증 산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천국이 가까워졌나? 십자가가 지천이다
- 박해성 <집에 가는 길> 전문 (『나래시조』2012년 겨울호)
이제 말은 도시 한 가운데서 바람에 떠밀리고 있다. 일상에 쫓겨 내몰린 도심의 길모퉁이에서 "만성두통 앓고 있는 신호등"으로 대체되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차라리 침묵을 택한 저 가로등은 "신열이 심한지 눈자위 종일 붉은" 상태다. 세상의 한 가운데서 내 몸의 안식을 위하여 집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종일 몰아치는 바람, 길 건너 저쪽을 건너야 하는데도 차마 건너지 못하고 건널목에 서서 서성이는데 도심은 더욱 수상해진다. "고비 풀린 욕망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문득 걸음을 멈춘 것이다. 어느 누구도 말을 걸어오는 법은 없다. 단지 점득하기 어렵고 수상한 행위만 있을 뿐이다. 그럴 때 문득 시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늙은 침묵의 벤치'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건너 여기까지 달려왔는가.지난 세월의 흔적이 대신 말해주고 있어 굳이 말이 필요 없다. 말보다 침묵이 훨씬 더 많은 말을 함의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때로는 몸피 덜어야 한 고비 넘는다고" 스스로 귀를 열어 말을 알아채는 것이다. 제목 <집에 가는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 되어야 하는데 굳이 '집에'라고 한 이유가 있다면 집이 갖는 방향의 의미보다 목적인 공간적 장소에 방점을 두었다고 본다. 매일매일을 살아내야만 하는 힘겨운 이 현실에서 '집'이라는 특정한 나만의 공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은 제대로 된 말보다 온통 "상투어가 밀고 당기는 외마디 유행가"만 난무한다. 이 힘든 현실은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 양방소통의 말로써 타자를 대하지 않는다. 오직 일방통행일 뿐이다.
위의 시편에서 말이란 대상과의 상호관계성 회복과 소통을 위해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문제는 혼잣말이든, 속엣말이든, 대상이 누구든 관계없이 발화 이후 다음 단계 즉 되새김질이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되새김질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은 말을 숙성시킨다. 숙성은 독성을 빼고 필요한 자양분으로 변모시킨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바로 이러한 말을 필요로 한다. 말이란 시간의 숙성, 즉 되새김질을 거칠 때 비로소 성찰과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앞의 시인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잠시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운 존재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을 사용하고 소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글쓴이- 박지현.
[출처] 계간 『시조시학』 2013, 봄호 <계간평> 에서 발췌
박지현
-1996년 『시와 시학 』시 등단.
-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등단.
- 시집; 『저물 무렵의 시』『바닥경전』외 4권
- 논문 ; 「일제강점기 저항시의 주체 연구」등.
- 수상; 2001년 지용신인문학상, 2008년 이영도시조문학상, 2010년 청마문학상,
- 아주대,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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