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당선작 14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남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신춘문예 시 2021.01.04

202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백향옥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

신춘문예 시 2021.01.04

202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야간 산행 여한솔 공룡처럼 죽고 싶어 왜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당선소감] 소감을 적어 내리려는데 왜 이럴 땐 ..

신춘문예 시 2021.01.04

202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1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고독사가 고독에게 ​ 박소미 ​ ​​ 나는 자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태동을 알아채는 침묵 이전의 기억 밑으로 밑으로, 웅크리고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재생에 몰두한다 어느 애도가 부재를 지나 탯줄로 돌아올 때까지, 타자의 몸속을 오가는 이 반복은 고고학에 가깝다 생환의 뒷면은 그저 칠흑 덩어리일까 벽과 벽 사이 미세한 빗살로 존재할 것 같은 한숨이 어둠 안쪽 냉기를 만진다 사금파리 녹여 옹기 만들 듯 이 슬픔을 별자리로 완성케 하는 일, 아슴푸레 떨어지는 눈물도 통로가 될까 북녘으로 넘어가는 해거름이 창문 안으로 울컥, 쏟아져 내린다 살갗에 도착한 바람은 몇 만 년 전 말라버린 강의 퇴적, 불을 켜지 않아도 여기는 발굴되지 않는 유적이다 잊기 위해 다..

신춘문예 시 2021.01.04

202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1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변성기 ​ 김수원​ ​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터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지 하나, 둘, 셋, 셔터만 누 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 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

신춘문예 시 202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