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heystar 2016. 1. 2. 12:00

 

■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 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 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움푹 파인 자국, 발자국들, 혀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 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1976년 전북 고창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

 

 

[심사평]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4편은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 간다. 은유된 언어의 머뭇거림과 확장, 빠른 질주와 멈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시는 마치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처럼언어로 만든 점과 선, 리듬으로 시에 여러 개의 경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언어적 상상으로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더불어 떠나고, 정신의 세계를 어루만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음운과 음운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달려간다. 시의 입술을 달싹여 저 마젤란 펭귄이 사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가는 것이 아마도 이 시인의 식물학이리라. 논의 끝에 응모작 5편 모두 고른 시적 개성과 성취를 가진 점을 높이 사서 입과 뿌리에 대한 식물학을 당선작으로 선했다.(황현산, 김혜순)